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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소현세자의 죽음은 북학과 북벌의 갈등 때문

 

조선은 1636 12월 병자호란과 1637 1월 삼전도의 굴욕을 겪으면서 국력의 한계를 보여준다. 그리고 인조와 서인정권이 내세우는 숭명반청의 기조가 얼마나 실속 없는 명분이었는지 알게 해줬다.

 

 

 

그 결과로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인질로 끌려가게 된다. 그런데 인조의 뒤를 이어 왕위계승 일 순위인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8년이라는 인질생활을 하고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죽음을 당한다.

 

 

소현세자의 죽음, 과연 독살일까?

1645 4 26, 인조실록에는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데, 시종일관 부정적인 내용이 일색이다. 실록의 기록은 소현세자에 대한 인조의 인식이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죽은 지 두 달 후에 치루어진 졸곡제에 대한 인조실록 기록에는 의문사를 추정할 수 있는 상황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위 기록에는 소현세자의 독살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또 한가지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하여 인조를 의심하게 하는 역사적 사실은 인조가 소현세자의 장례를 서둘러 마친 점과 후계자도 세손(소현세자의 아들)을 두고 자신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후의 효종)을 지목한 점이다.

 

<소현세자의 가레의궤>

 

이는 조선 역사에서 비슷한 사례가 있다.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영조도 왕위는 세자의 아들인 정조에게 물려준 사실과 비교해볼 때 인조의 결정은 의문을 들게 한다.

 

 

북학과 북벌의 갈등, 북학의 꿈을 지녔던소현세자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항복의식을 행한 인조를 지켜본 소현세자는 당연히 반청감정을 지니고 있었고 8년이라는 인질생활에서 풀려난 그가 귀국한지 두 달 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한 이유는 뭘까?

이를 추리해 보기 위해서는 청나라 심양에서 8년간의 인질생활과 이에 대한 소현세자의 생각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인조실록에는 심양에서 소현세자의 생활을 부정적으로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반청 입장인 인조와 서인세력의 영향으로 보이며 그보다는 청나라를 정치, 문화, 군사의 강국으로 보는 현실적인 시각을 가진 친청파의 중심에 소현세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심양에서의 인질생활이지만 소현세자는 청나라의 놀라운 발전과 서구의 근대 과학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청나라의 개방적인 자세에 놀랐으며, 소현세자의 이러한 현실적인 직시는 비록 인질로 잡혀왔지만 청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하였다.

그러나 1645 8년 만에 돌아온 조선에서는 세자의 귀국을 반가워하는 이가 드물었다. 소현세자에 대한 청나라의 호의적인 입장과 신뢰는 인조를 비롯한 조정대신들에게는 눈에 가시나 다름없었다. 이는 차기 왕위계승 일 순위인 세자의 위치를 생각할 때 독살설의 상당한 근거가 되겠다.

 

<소경원>

 

거기에 더해 인조의 피해의식도 한 몫 하였다. 인조는 청이 자신을 폐위시키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끊임없이 경계하였다. 쿠데타(인조반정)로 왕위에 오른 왕으로서 느끼는 본능적인 왕위 집착이 아닐까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