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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복수설치와 숭명반청의 명분에 사로잡힌 효종의 북벌추진

 

1644년 청나라는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중원의 패권을 차지한다. 그 결과로 소현세자의 인질생활은 8년 만에 끝이 난다.

이듬해인 1645년 소현세자는 인질에서 풀려 조선으로 귀국한다. 그러나 인조의 왕위계승 일 순위인 왕세자임에도 불구하고 불과 두 달 만에 죽음을 맞았다.

 

<효종이 숙명공주에게 보낸 편지>

 

 

복수설치와 숭명반청의 명분

북학의 전도사가 되려는 부푼 기대를 안고 귀국한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동생인 봉림대군에게 뜻하지 않은 왕위를 선사한다. 그러나 봉림대군은 자신이 왕이 된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인조에 뒤를 이어 조선 17대 임금에 오른 효종이다.

형 대신에 왕위에 오른 효종은 당시의 정치논리를 절감하고 있었다. 아버지 인조의 삼전도 굴욕을 복수(복수설치, 복수하여 치욕을 씻음)해야 하고 서인 세력의 주장인 숭명반청을 국가 정책으로 펼쳐야 함을 말이다.

그런 숙명을 짊어진 효종은 즉위하자 제일 먼저 김자균 등 친청파를 제거하였고 김상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 반청척화파(청에 대항하여 화의를 배척한 파)를 등용하였다. 특히 대군 시절 스승이었던 송시열의 등용은 북벌의 이념을 전파할 전도사의 사명을 맡기려는 효종의 복안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두 차례의 호란을 겪은 위기의 시점에서 왕위에 오른 효종에게 북벌의 추진은 결코 쉽지 만은 않은 사명이었다.

 

 

효종의 북벌추진

효종이 추진하는 북벌정책에 유일한 지원군은 그의 스승이었던 송시열이 아니었다. 실제 효종의 북벌추진에 끝까지 함께한 인물은 어영대장 이완이었다. 이완은 북벌추진의 중심기구로 설치한 어영청의 대장으로 효종이 지명한 인물이었다.

이완의 충성은 마지막으로 남긴 유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완은 자신이 죽으면 자신을 효종의 무덤 인근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고 실제로 그의 무덤은 효종의 묻힌 경기도 여주의 영릉 인근에 묻혔다.

 

 

 

효종과 끝까지 함께한 이완과는 달리 송시열이나 송준길은 효종의 기대를 외면하였다. 이들은 북벌을 위해서는 먼저 내수를 중시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지금 씻기 어려운 수치심이 있는데도 모든 신하들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매양 수신만을 권하고 있으니 이 치욕을 씻지 못하면 수신만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위 내용은 효종 5년에 내린 교서의 일부 내용이며 효종이 얼마나 외롭게 북벌을 추진 했는지 보여주고 있다.

 

또한 중국의 상황도 더 이상 효종의 북벌추진을 돕는 형국은 아니었다. 이미 멸망한 명나라를 위한 복수는 하루가 살기 어려운 백성들에게는 공염불과 다름없는 명분일 뿐이다. 그리고 중국의 형세는 명나라의 잔존세력이 완전히 제거되었고 청나라가 확실히 중원을 지배하는 구조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청나라의 감시체제는 효종의 북벌 준비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결국 효종은 북벌의 실천을 위해 왕의 자리에 있던 10년 동안 애썼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북벌을 위해 즉위했고 재임 10년 북벌에만 매진했지만 효종의 죽음으로 삼전도 치욕의 복수는 북벌에 대한 효종의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허망하게도 효종의 사인은 종기였다. 종기 치료를 위해 놓은 침이 혈맥을 잘못 찌른 것이다. 그렇게 1659 5 4일 효종은 창덕궁 대조전에서 허망하게 승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