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positorium/History

명량해전의 명장 충무공 이순신과 칠천량해전의 패장 원균

 

작년 영화 '관상'의 흥행몰이의 여파인지 올해 유난히 사극 영화의 개봉이 줄을 잇고 있다. 인물들은 다르지만 조선시대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이순신의 해전과 진주민란을 배경으로 한 군도가 관객들에게 초미의 관심작으로 떠오르고 있다.

 

 

 

조선사를 통틀어 가장 비극적이고 굴욕적인 사건이었던 임진왜란,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성웅 이순신이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이름을 알만큼 지금까지 줄곧 영중중의 영웅으로 후세까지 영원히 기억될 이름이 될 것이다.

 

 

칠천량해전의 패장 원균

이순신과 반대되는 이미지로 기억되는 인물중에 단연 으뜸은 원균이다.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여 그의 자리를 빼앗았으나 왜군과의 해전에서 대패하고 도망치다가 처참하게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균의 묘가 평택 도일동에 있는데 전해져 내려오는 바에 따르면 목 없는 원균의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하였던터라 진짜 원균의 묘일지는 불확실하다고 한다.

원균은 1540년 태어났다. 이순신이 1545년에 태어났으니 5살 형님이 된다. 이순신이 태어난 가문은 벼슬자리와 멀어진 해 지는 가문이었고 원균의 가문은 대대로 무반의 벼슬을 해 오던 명문가중 하나였다.

아버지 원준량이 아들의 무과시험에 관련되어 탄핵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 아들이 원균인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당시 원균은 4형제였는데 둘째는 문과에 급제해 있었고 세째와 넷째는 나이가 한참 어렸기 때문이다.

 

<사진출처 : doopedia>

 

원균은 1579년 늦은 나이에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나서게 되는데 이순신이 1576년 무과급제했으니 나이는 5살 어리지만 무과급제는 이순신이 먼저했다. 원균은 국경 근처 변방에 배치되었으나 이렇다할 공적을 세우지 못하다가 오랑캐를 무찌르고 경상우수사로 승진하게 된다. 이 때 이순신도 변방에서 오랑캐와 대적하지만 전쟁에 패하였다. 

원균은 경상우수사로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각각 자리를 옮기고 얼마 안되어 임진왜란이 발발하게 된다. 원균은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하지만 이순신은 전략적 판단으로 지원할 수 없다고 미루다가 20여일 후 원균의 병력과 합세하여 왜구를 물리치는 쾌거를 이룬다.

이순신이 불복종등의 죄목으로 물러나자 원균이 그 자리에 오르게 되지만 원균은 칠천량에서 패하고 도주하다가 목이 잘리는 최후를 맞고야 만다.  추측컨대, 그도 이순신만큼이나 해전에 능함을 보여주고 싶었을텐데 야속하게도 바다는 원균을 궁지로 몰아 넣고 죽음에 이르게 하였다. 

거기까지가 그의 역량이었다.

 

 

명량해전의 명장 충무공 이순신

변방에서 오랑캐와 싸우던 두 장수 원균과 이순신, 오랑캐를 무찔었던 원균은 해전에서 패하고 전사했으며 오랑캐에게 졌던 이순신은 바다에서 23전 23 전승의 쾌거를 이루어 냈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선조는 이순신과 더불어 원균도 1등 공신에 올려 놓았다.

이는 이순신 세력을 견제하려는 의도였다는 설과 함께 패전한 장수에게 1등 공신은 과하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서 전장에 나간 장수가 꼭 승리를 해야만 인정해 주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니 원균이 공신에 오른 것은 우국충정이라는 큰 전제하에 인정할 수 있다고 하겠다.  

원균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여기까지가 끝이다.

 

최근 원균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역사적인 재조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일고 있어 그 배경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원균의 후손들이 그동안 자신의 조상이 간신과 아첨배의 상징처럼 보인것에 대해 바로 잡으려 노력하는 것은 아랫사람의 도리가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원균이라는 인물에 근본을 둔 것이어야지 이순신에 대한 상대적인 폄하로 이어져서는 안되고 무리한 추측과 가설을 이용해서도 안 된다. 

 

<사진출처 : 대한민국기록관, 국보 제76호 난중일기>

 

이순신역할 캐스팅을 받고 그에게 누가 될까 고심했다는 최민식의 말처럼 이순신에 대한 우리의 정서가 아직은 '신성'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