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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백제의 역사 - 한성에서 웅진(공주) 그리고 사비(부여) 천도까지

 

고구려 주몽과 재혼한 졸본부여 소서노와의 사이에는 비류와 온조 두 아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전에 주몽은 아들 유리를 두었었다.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안정을 찾자 유리가 찾아왔고 그를 후계자로 삼자 비류와 온조는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남쪽으로 내려가 비류는 미추홀(인천)에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세력을 키워 나갔다.

하지만 비류의 세력은 확장 되지 못하고 온조의 세력권에 합류하였고 온조는 합쳐진 세력으로 나라를 세우고  백제라 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의 비옥한 땅과 한강을 기반으로 온조부터 개로왕까지 493년간 백제 부흥의 시대를 열었다. 하지만 개로왕 때(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백제 한성시대를 마감하게 된다.

고구려에 대항할 지원병 1만여 군사를 신라에서 지원받아 문주왕이 달려왔으나 이미 상황은 백제의 패배로 종료되어 한성은 폐허로 변해 버렸고 개로왕은 살해 되었다.

이에 문주왕은 백성들을 이끌고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문주왕이 웅진(공주)을 도읍지로 정한 것은 강이 흐르고 산이 방어벽 역할을 해 주는 공주의 방어적 위치와 함께 그곳 토착 세력의 전폭적 지원 때문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견해이다.

수촌리에서 발견된 고분에서 백제 왕실에서 하사한 것으로 보이는 금동 신발과 금동관모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들이 천도에 큰 영향을 끼친 공로로 이같은 하사품을 받았을거라는 것이다.

 

<녹유잔과 받침>

 

문주왕으로부터 성왕 때까지 64년간 백제의 부흥기를 웅진에서 열었던 백제 동성왕은 신라 왕족과의 혼인을 통해 관계를 돈독히 하며 고구려 세력을 견제하고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는 등 국제관계를 넓혀 나가며 왕권 강화에 주력 하였다.

정치적 경제적 기반이 잡혀 나가자 웅진성을 떠나고자 하는 왕들이 생겨났으나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성왕에 이르러 사비(부여)로의 천도가 단행되었는데 사비는 동성왕이 이전부터 새 도읍지로 눈여겨 둔 곳이다.

금강을 따라 비옥한 평야가 펼쳐져 있고 중국으로 가는 뱃길이 훨씬 수월한데다가 허겁지겁 정하고 한 달만에 천도했던 웅진성과 달리 사비성은 사전계획과 준비를 거쳐 천도를 하였다.

 

 

 

사비로 천도한 성왕은 국호를 남부여로 고치고 백제의 숙원 사업인 옛 한성을 되찾기 위해 신라와 손을 잡고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하고 백제의 발달한 문화와 불교를 일본에 전파하기도 하는 등 백제는 사비성에서의 122년 동안 안정된 부흥기를 보냈다.

하지만 권력층의 내부 분열과 신라의 '통일삼한'의 대업을 가진 김춘추에 의해 의자왕 때에 멸망하였다.

 

 

 

한강의 유역과 금강 유역등 남한의 주요 지역을 돌며 700여년의 역사를 가진 백제였다.

나라가 건국되고 부흥기를 지나 멸망하는거야 당연하지만 도읍지가 세 곳씩이나 되는데 남겨진 자료들이 역사에 비해 너무나 적어 아쉽다.

용맹한 고구려나 화려한 신라와는 달리 온화함을 대표되는 백제의 지역적 특성과 문화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어지는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