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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계축일기 - 폭군 광해군에 대항한 인목대비의 선택

 

계축일기의 줄거리

부왕인 선조에게 올릴 탕약이 오기를 기다리며 광해군은 온기하나 없는 여차(부왕의 병시중을 들기 위해 만든 임시 처소)에서 떨고 있었다.

16년전 왜군이 쳐들어 왔을 때 난리중에 세자로 책봉 되어 혼란스러운 시기를 무사히 넘기며 왕의 자질로서 인정을 받았다고 생각했지만 요즘 부왕이신 선조의 마음이 이전과 같지 않아 조바심이 나던 터였다.  선조의 정비에게서는 아들이 없어 후궁인 공빈 김씨의 소생인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는데 후에 맞아들인 정비(인목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을 낳은 뒤로 광해군은 자신의 자리가 불안함을 느꼈다.

 

 

 

선조가 죽자 광해군은 영창대군의 존재가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억지 역모사건을 꾸몄다. 서자 박웅서가 저지른 강도 살인사건을 역모사건으로 꾸며 인목대비의 친정을 몰살하고 영창대군을 궐 밖으로 내보냈다.

인목대비는 어린 아들의 목숨이 위험해질 것을 염려하여 광해군에게 엎드려 선처를 호소하였으나 광해군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임금의 총애를 받는 상궁 가희는 대전의 나인들을 시켜 인목대비전의 나인들을 함정에 빠뜨리고 그 죄를 인목대비에게 덮어 씌우려 하였다. 그러던차에 영창대군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비전의 상궁들은 차마 이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나중에 알게 된 인목대비는 자살을 결심하지만 헛된 죽음은 역사에 진실을 남기지 못하므로 살아서 진실을 밝히고 치욕을 갚아야 한다는 상궁의 말을 듣고 겨우 정신을 차린다.

광해군은 계축옥사가 일어난지 5년만인 1618년에 인목대비마저 폐위시키고 서궁에 유폐시켰다. 그리고 모든 물자를 금지시키고 쓰레기마저도 치워주지 않았다. 하지만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폐위를 당하고 강화도로 유배를 갔다가 죽었다.

 

 

광해군과 인목대비

계축일기는 인조반정 이후에 쓰여진 궁중문학작품이다. 작가는 알려저 있지 않지만 그간 궐내의 사정을 소상히 알고 있는 두 명이상의 인물이 썼을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쫓겨나고 승자라 할 수 있는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쓰다보니 광해군은 천륜을 저버린 폐륜의 인물로 그려지고 인목대비는 남편을 잃고 자식까지 잃은 비운의 여인으로 그려졌다. 실제 작가는 인목대비의 한서린 삶을 쓰려면 남산의 대나무를 모두 베어다 붓을 만들어도 모자를것이라며 우여곡절 많은 그녀의 모진 삶을 극대화 해서 표현했다.

 

 

흥미로운 것은 인목대비가 자신의 친정이 몰살 당해 가문이 문을 닫을 것을 염려해 광해군에게 영창을 내어줄것이니 남동생을 살려 가문을 이어 나가게 해 달라는 협상의 편지를 보낸 것이다. 친정을 살리고자 어린 아들의 손을 놓은 것인데 모정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하지만 당시 양반집 딸들의 출가는 친정과 연이 끊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남자들만큼이나 친정 가문에 대한 소속감이 높았으니 차후 정치적인 재기를 위해서도 친정의 가문이 멸문으로 가는 것은 막아야 했을것이라는 게 이순구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의 해설이다. 이제서야 왜 그녀가 치욕을 참으며 목숨을 부지했는지 이해가 된다.

 

 

인목대비의 선택

요즘 재밌게 보는 드마라가 기황후 이다. 고려 공녀의 신분으로 중국 황후의 자리까지 올라 간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이 역사적 사실과는 많이 다르게 극으로 전개되고 있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녀의 행동들은 적어도 처음엔 살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기에 죽을 수가 없었고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보호해줄 권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어머니로서 대우하지 않고 모멸감을 주는데도 목숨을 부지한 이유가 자식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친정 가문을 지키고자 한 것인지 모르지만 덕분에 그녀의 가문은 멸문하지 않았고 역사적으로도 광해군은 임금이 되지 못했고 인목대비는 이름을 높였으니 그녀의 선택이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