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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원나라 기황후와 조선왕조 일등공신 이지란의 수구초심

 

원나라 기왕후

고려의 공녀로 원나라에 간 조선의 처자 기씨는 지혜롭고 명민했다. 고려 출신의 환관들이 똑똑한 그녀를 황제의 눈에 띄게 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원나라 황실에서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기씨를 후궁쯤으로 앉혀도 대단한 성공이라 할 수 있는데 그녀는 제1황후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기황후는 아들을 낳고 37년간 황후의 자리에 있으면서 원나라와 고려 양국의 정치에 관여하는 바가 많았다고 한다. 남편에게 황제의 자리를 아들에게 물려주라는 압박을 가할 정도의 두둑한 배짱를 가진 기황후였다. 

그녀가 황후자리에 있을 즈음부터 원나라는 쇠퇴의 길을 걸었고 급기야 명나라 주원장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응창부로 수도를 옮기고 피난을 떠났다. 기황후가 고려에 지원군을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인물한국사 기황후편)

 

 

여진족 이지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의형제를 맺은 이지란의 본명은 쿠란트란티무르, 여진족 장수였다. 원나라가 명나라에 의해 망하게 되자 군사를 이끌고 평소 친분이 있던 이성계를 보고 고려 공민왕때에 귀화하여 청해에 정착하였고 청해 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그는 전장에서 용맹스런 장수였고 특히 활솜씨가 뛰어났다. 이성계와 더불어 왜구를 무찌르고 조선건국의 일등공신과 제1차, 2차 왕자의 난에도 공신으로 봉해져 좌찬성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인물이다.

 

 

이지란은 태조가 정계에서 물러나자 그도 정계를 은퇴하고 절에 들어갔지만 그의 아들인 화영은 세종초에 우군부판사가 되었고 7세손인 인기는 선조때 중추부동지사가 되는 등  조선에서 가문의 뿌리를 튼튼히 내렸다. 이성계와의 관계로부터 시작된 조선과의 인연이었지만 이지란의 후손들은 조선의 조정에서 오랫동안 국사의 중책을 맡아 왔다.

 

 

고향을 그리는 마음, 수구초심

피난 이후 기황후의 행적은 알려진바가 없다. 그녀의 남편인 순제는 피난 도중 응창부에서 죽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기황후의 죽음이나 묘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나라 연천에 그녀의 무덤이 있다는 '동국여지지'의 기록이 있을 뿐인데 이또한 확인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녀가 죽음의 문턱에서 육신만은 고향에 묻히고 싶었을 거라는 추측만이 가능하다.

이지란은 정계를 은퇴하고 절에 들어가 전쟁에서 죽인 수많은 목숨들에게 죄를 빌면서 여생을 보내다가 죽음이 다가오자 태조에게 편지를 썼다. 자신이 죽으면 중국 본토의 방식대로 장사지내달라는 내용이었고 이성계는 원대로 해 주었다. 이지란이 살던 곳은 조선이었으나 죽음에 직면한 그가 영혼의 안식처로 선택한 것은 여진족이었다.

 

 

 

수구초심(首丘初心)

여우가 죽을 때에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바르게 하고 죽는다는 말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비유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