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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종묘에는 종묘를 재건한 광해군 자리는 없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세우고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삼으면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충, 효, 예이다. 그 중 효와 예의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종묘이다.

유교에 따르면 국가 설립과 동시에 궁과 종묘와 사직을 짓는 것이 중요하였기에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경복궁을 짓기 전에 동쪽에 종묘를 왼쪽에 사직단을 지었다.

 

 

 

종묘의 역사 - 종묘를 재건한 광해군

종묘는 돌아가신 조상의 신위를 모시는 사당으로 태실이 모여 있는 곳을 정전이라 부른다. 종묘는 임금이 백성에게 보여야 할 효와 예를 행하는 본보기의 장소였다.

유교의 예법에 다르면 돌아가신 4대 조상까지 신위를 모시기 때문에 처음 종묘의 태실은 5칸 이었다고 한다. 이곳에 이성계의 위로 4대 조상을 추존왕으로 모셨었다.

태실에 신위를 모실때는 서쪽에서 동쪽 방향으로 서열에 따라 자리한다. 4대 조상을 모시다가 돌아가신 분이 생기면 가장 웃대 조상의 신위를 땅에 묻고 새로운 분의 신위를 추가 하게 되면서 4대 조상을 유지한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정전이 소실되었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종묘를 재건한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11칸으로 증축되었던 정전을 그대로 재건하였고 추존왕과 재위 기간이 짧았던 왕들을 모셨던 영녕전도 재건하였다.

광해군은 종묘 외에도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창덕궁을 재건하는 등 전쟁으로 인해 소실된 국가 주요 건물들의 재건에 힘을 기울였다. 인력과 재정 등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결국 완공시켰다.

 

 

 

11칸이었던 태실은 영조와 헌종때 각각 4칸씩 증축되어 현재의 19칸이 되었다.

종묘의 정전과 영녕전은 엄숙하고도 웅장한 모습이 경이롭기까지 하며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제례와 제례악이 그대로 전승되는 점이 인정되어 1995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지정되었고 종묘제례와 종묘제례악은 2001년에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등재되었다.

 

 

종묘에는 광해군 자리는 없다

중간에 전쟁으로 소실된 종묘를 재건한 것은 광해군인데 광해군과 연산군은 종묘에 모셔지지 않았다. 효와 예의 상징인 종묘에 효와 예를 거스른 왕을 모실 수 없다는 이유때문이었다.

어려운 여건에서 어찌해서라도 안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조상신들을 모시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종묘을 재건한 광해군은 죽은 조상에 대한 효와 예는 깊었으나 산 조상인 인목대비에 대한 효와 예가 부족해 종묘에 들지 못한 것이다.

지금의 종묘를 있게 한 장본인임에도 종묘에 들지 못하고 궁 밖에서(광해군의 묘는 경기도 남양주)에서 떠도는 광해군의 심정은 어떨까?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종묘 제례 행사가 열린다.

하지만 구천을 떠도는 그의 혼이 온다해도 앉을 자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