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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왕자의 난을 통해 본 정도전과 이방원 (태종)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는 2명의 정비와 4명의 후궁에게 적자 8명과 적녀 3명 그리고 서녀 2명을 얻었다. 이성계가 왕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 세상을 떠난 첫째 부인 신의왕후 한씨 소생으로 방우, 방과(정종), 방의, 방간, 방원(태종), 방연 등 6남과 경신, 경선 등 2녀를 두었다.

그리고 둘째 부인이자 계비였던 신덕왕후 강씨는 방번, 방석, 경순 등 2 1녀를 낳았다. 이처럼 많은 자식들을 둔 이성계는 새로운 왕조를 열었지만 개국 과정의 혼란 속에서 가족간의 골육상쟁을 맛 본 임금이기도 하다.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 정도전

국운이 기울어가던 고려왕조를 폐하고 성리학 사상을 통치이념으로 새로운 왕조를 세울 수 있음을 정도전에게 심어준 사상적 배경은 맹자이다. 즉 맹자는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 물리력으로 왕조를 교체할 수 있다는 성리학 사상을 주장한 이다.

 

 

 

이성계와 인연을 맺은 정도전은 1388년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에 성공하자, 밀직부사에 올라 조준 등과 함께 전제개혁안을 건의하고, 조민수 등 구세력을 제거하고 이성계가 고려의 조정을 장악하도록 애썼다.

그러나 1392년 봄 이성계가 사냥 중에 낙마하여 병상에 눕자 정몽주에게 탄핵을 받아 유배를 가게 된다. 그러나 정도전을 탄핵한 실제 목적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러한 정몽주 일파의 정치적 압박에 위기감을 느낀 이방원은 정몽주를 살해하는 파격을 행한다.

바로 선죽교(당시는 선지교)에서 정몽주는 피를 흘리며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풀려난 정도전은 1392 7월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조선을 개국하게 된다. 이는 정도전이 꿈에 그리던 성리학적 이념의 새 왕조의 건국을 이룬 셈이기도 하다.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

태조 이성계는 둘째 부인 강씨를 총애했다. 권문세가 출신인 강씨는 태조의 조선 개국에도 직접 참여하여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정도전 등 신진사대부 출신의 개국공신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강씨의 영향력은 세자 책봉에도 미치게 된다.

태조는 첫째 부인 한씨 소생의 장생한 아들들을 제쳐두고 강씨 소생의 여덟째 아들 방석을 세자에 책봉한다. 1392 8월 방석의 나이 11세였으며, 정안군 방원의 나이는 26세였다. 방원은 맏형 방우를 세자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태조는 들은 척도 안 했다.

 

 

 

방원은 위화도에서 회군을 주장했으며, 정몽주를 살해해 위기에 몰린 역성혁명 세력을 구했으며 왕대비 안씨를 압박하여 공양왕을 폐위시켜 이성계를 왕위에 올리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주인공이지만 왕후 강씨와 정도전 등 개혁파의 배척으로 군권을 상실하고 개국공신 책록에서도 제외되는 설움을 맛보게 된다.

이러한 이성계와 강씨, 정도전의 이방원에 대한 지나친 경계는 조선왕조의 시작부터 피비린내 나는 살육의 역사를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1398 8 25, 방원과 첫째 부인 한씨 소생 왕자들은 사병을 동원하여 정도전, 남은 등 반대파를 살해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죽인 난을 일으킨다. 이를 역사에서는 1차 왕자의 난’, ‘방원의 난’, ‘무인정사’, ‘정도전의 난이라고 부른다.

방원은 정도전에게 병권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제거했지만, 자신이 권력을 잡자 세력 강화를 위해 왕족들의 사병을 혁파할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맞게 된다. 훗날 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