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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강화도조약과 운요호(운양호)사건

 

강화도조약과 운요호(운양호)사건

1875년 운요호와 제이정묘호를 앞세워 부산 앞바다로 들이 닥친 일본은 조선의 해안을 조사하러 왔다는 핑계를 대며 동해안을 거쳐 남해, 서해안을 둘러 보기 시작했다.

일본의 군함은 영국에서 들여 온 최신 함대로 배의 규모와 장착된 무기만으로 조선 수군은 압도 당했다.

 

 

 

윤요호의 함장 이노우에는 강화도 초지진에 근접하여 보트를 타고 물을 보급하러 왔다고 하였지만 예고 없는 왜군의 등장에 조선 수군은 보트를 공격하였고 이들은 돌아가 함대를 끌고와 함포로 보복 공격을 하였다.

이들은 영종도에 상륙한 후 수탈과 방화를 한 후 함대로 돌아갔다.

 

 

 

일본은 다시 강화도로 함대를 끌고와 지난번 조선군의 일방적인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며 피해보상 요구와 함께 조약을 맺을 것을 요구하였다.

자신들은 조선의 해안을 조사하러 왔음에도 군사공격을 받았으니 배상하라는 것인데 일본 군함의 강력한 무장 때문에 조선은 일본의 요구대로 1876년 2월 26일 강화도조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강화도조약은 가나가와조약의 모방

강화도조약은 조선이 국제법에 따라 일본과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라고 한다. 하지만 당시 대형 군함의 무력 앞에 반강제적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라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

 

 

 

강화도조약에 따라 부산과 원산, 인천등의 항구를 일본에 개항해야만 하였고 조선에 있는 일본인들에게는 치외법권을 인정하여 조선에서 무슨 짓을 하든 조선의 법이 아닌 일본에 돌아가 일본의 법에 따라 처벌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게다가 마음대로 조선의 해안을 조사, 측량할 수 있도록 하여 중요한 지리적 자료를 수집할 수 있는 권한마저 넘겨 주었다.

 

 

 

일본의 위력에 맺은 강화도조약은 1854년 미국의 페리 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일본 해역으로 와서 일본에게 반강제 개항을 요구했던 것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었다.

위용을 자랑하는 페리제독의 군함 4척을 보고 놀란 일본은 항구를 열어주고 교역에 대한 최대한의 수혜를 미국에게 주는 가나가와 조약을 1854년 3월에 체결했다.

 

 

 

 

1800년대 말, 서양의 열강들은 최신 무기를 앞세워 아시아의 여러 나라 문호를 무력으로 개방하였다.

시대의 흐름인 서구의 문물을 빨리 받아들이고 일본보다 앞서 서구에 문호를 개방하였다면 강화도의 시련도 조선의 시련도 적었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