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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임진왜란과 6.25 전쟁의 닮은 꼴 - 휴전협상에 한국대표는 없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김일성은 새벽을 틈 타 남침을 강행했다.

예상치 못한 북한의 도발에 남한 정부는 허둥지둥 됐으며 4일 만에 서울은 함락되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 도움을 요청하였고 미국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약칭 안보리)를 열어 국제연합군을 한국에 투입하도록 하였다.

 

6.25 전쟁과 휴전협상

1950년 9월 15일 유엔 총사령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성공적으로 서울을 탈환하였고 북으로 공격적인 진격을 하였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이 후퇴를 하게 되면서 6.25전쟁은 1년 남짓으로 끝날 것 같더니 장기전으로 바뀌었다.

 

 

 

유엔군이 심기일전하여 서울을 재탈환하면서 북으로 진격하려 하였으나 소련이 제기한 휴전협상에 미국을 비롯한 유엔이 동의를 하였다.

미국과 소련은 많은 인명피해와 추기비용의 부담으로 전쟁을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고 이승만 정부는 전쟁을 끝내야지 의미없는 휴전은 향후 더 큰 전쟁을 예고하는거라며 반대입장을 표했다. 이에 대한 거부의 표시로 협상장에 있던 국군대표단을 빼 버렸고 미군의 동의없이 반공포로들을 석방시켰으며 국군에게 북으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모든 군사작전권을 유엔군에게 넘겨줘 버렸기 때문에 한국군은 전쟁 당사국이면서도 휴전협상에서는 발언권이 미약했다. 1953년 7월27일 10시, 휴전협상장인 판문점에는 한국을 제외한 유엔연합군 대표 클라크와 북한의 김일성, 중공군 대표 팽덕회가 참석하였으며 이들 3인이 휴전 협정문서에 사인을 하였고 우리는 최덕신 소장이 배석만 하였다.

 

 

임진왜란과 6.25 전쟁의 닮은 꼴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시작된 전쟁에 속수무책이었던 남한 정부는 한 달도 안 되는 시기에 유엔군에 도움의 손길을 청하면서 전쟁시 군작전권을 모두 넘겨 버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상황이라고 여겨지면서도 안타까운 부분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전쟁당사국이면서도 휴전협정 시 뒷자리에 앉아 있어야만 하는 처지가 되었다.

 

 

역사는 돌고 돈다는 말이 맞다.

임진왜란시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였던 조선은 명나라가  지리한 조선의 전쟁(명나라 입장에서)에 종지부를 찍고자 일본과 강화협상을 하였다.

명나라는 북쪽을 일본은 남쪽을 차지하자는 명나라의 제안을 듣고 선조는 결사항쟁을 외쳤지만 정작 협상테이블에는 명나라와 일본이 앉아 있었다.

위급할 때 명나라 손에 조선의 군사지휘권을 모두 쥐어 주고 그 뒤에 앉아 주어진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1598년의 조선과 1953년의 대한민국이 닮아 있음이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