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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창/느낌있는 여행

정조가 머물렀던 화성행궁과 어진이 봉안된 화령전

 

어린 나이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세자빈의 자리에 오르지만 지아비가 비명횡사하는 과정을 속수무책 지켜봐야만 했던 비운의 여인 혜경궁 홍씨.

모진 목숨을 놓지 못한 이유는 어린 아들 때문이었다. 지독한 시아버지 영조는 그녀에게서 어미의 자격을 빼앗아 버렸지만 (정조를 사도세자의 형인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한 후 왕위 계승) 그럴수록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을 극진히 모시었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 화성으로 옮기고 매년 찾아 뵈던차에 어머니 혜경궁의 환갑 잔치를 화성에서 열기로 하고 8일간의 행차길에 올랐다. 그 장대한 규모의 행차 과정과 모습이 화성능행도에 자세히 그려져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정조가 화성에서 머문 곳은 행궁인데 그는 이곳에서 6박 7일간 어머니 혜경궁과 함께 머물면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참배하고 어머니의 환갑잔치를 벌였다.

 

 

 

 

행궁은 임금이 궁 밖으로 행차할 때 잠시 머무르는 별궁으로 이궁이라고도 부르며 임금이 머무는 정전과 함께 수행한 사람들의 처소가 행궁 안에 마련되어 있다.

 

 

 

 

1795년 음력 2월9일 한양 창덕궁을 떠난 정조의 행차는 다음날인 2월10일에 화성 장안문을 들어 섰다. 정조는 장안문을 들어서기 전에 갑옷으로 갈아 입어 군주의 용맹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화성행차 셋째날인 2월11일에 낙남헌에서는 문무과 별시가 치뤄졌는데 이 때 정조는 어머니 혜경궁의 만수무강을 비는 '근상천천세수부'라는 시제를 내주었다.

 

 

 

 

넷째날인 2월12일에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에 어머니와 함께 갔는데 오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비통함에 차마 돌아가는 발길을 떼지 못하였다고 한다.

 

 

 

다섯째 날인 2월13일, 어머니 혜경궁의 환갑잔치상을 봉수당에 마련해 술을 석 잔 올리고 만수무강을 기원하였고 춤과 음악으로 어머니를 기쁘게 해 드렸다.

 

 

 

 

 

여섯째날인 2월 14일에는 신풍루에서 독거노인과 과부, 고아 등에게 죽을 나눠 주고 방화수류정에 올라 화성을 살펴 보고 득중정에서 신하들과 활쏘기를 하면서 다음날 한양으로 올라갈 채비를 하였다.

 

 

 

 

 

행궁 옆에는 정조가 돌아가시고 나서 어진을 봉안을 위해 어진봉안각인 화령전이 있다.

화성의 '화'자와 돌아가 부모에게 문안하라는 '귀령부모'의 령자를 따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임금이 가까운 곳을 한 번 나가려해도 준비하고 갖춰야 할 것들이 많아 번잡스러운데 매년 화성을 찾은 정조의 부지런함은 꼭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만은 아니였을 것이다.

가까이에서 백성들을 마주하고 그들과 소통하려고 노력했던 성실한 군주의 모습이 담겨 있어 정조의 화성행차가 더욱 감동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