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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한반도 구석기 유물의 가치 - 석장리 박물관 (2)

 

반도라는 지리적 영향으로 우리나라는 북쪽으로 중국을 견제해야 하고 남쪽으로 일본을 살펴야 했다.

영토와 인구, 군사력만을 비교한다면 이미 오래 전에 중국 변방의 소수 민족으로 흡수되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고 일본과의 역사적 질긴 악연을 생각하면 그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우리나라가 현재 이처럼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기적같은 일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의 시조 단군에 대한 기록은 후대에 기록된 자료들을 통해 지금까지도 잘 알려져 내려 오고 있으며 이같은 자료를 통해 우리는 5천년의 역사를 가진 자랑스러운 민족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자긍심은 오랫동안 잦은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는데 있어 아주 큰 힘이 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유럽등에서는 1800년대에 이미 고고학이 발달하여 유적지 발굴에 관심이 많았으나 아시아 지역에서의 고고학은 그리 흥미로운 학문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까운 중국의 경우도 1920년 외국 학자가 몸돌(떼어내기 전 원석)과 격지(떼어진 자투리 돌)를 발견하면서 중국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후로 구석기 시대 인간의 뼈등을 발굴하는데 성공하여 고고학계의 뜨거운 반응을 얻어내면서 중국은 문명의 발상지와 인류 진화의 근원지로서 고고학계의 뜨거운 반응을 받았다.

 

 

 

석장리 박물관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한반도에 선사시대는 없었다'는 일본의 주장을 반강제적으로 인정하며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자료는 물론 지원이 전혀 없으니 관심이 있다 해도 조사와 발굴 작업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1964년, 석장리에서 외국 학생이 쪼개진 돌을 발견하고 그것을 본 고고학자 손보기 선생이 이곳이 구석기 시대와 관련이 있음을 짐작하고 발굴을 시작하였다.

당시 연세대 발굴 조사팀을 이끌며 발굴 작업에 나선 손보기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 구석기 유물들을 대량 발굴하는데 성공하였고 세계 학계에 한반도에도 선사시대의 흔적이 있었음을 알리는데 큰 공을 세웠다.

 

 

 

더구나 이전까지 교과서에서마저 언급 되지 않았던 구석기, 신석기 시대를 자료와 함께 게재하여 우리나라의 역사가 오래 되었음은 물론이고 그동안 일본에 의해 왜곡되어진 고고학적인 역사를 바로 잡는 계기가 되었으며 중국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문물과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가 정착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한반도의 구석기 유물은 석장리를 시작으로 전국 100여 곳에서 발굴되었고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물은 연천 전곡리에서 발견되었고 단양의 동굴인 금굴에서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화덕과 석기들이 발굴되는 등 선사시대 유물들이 전국 각지에서 골고루 드러났다.

 

 

 

우리나라보다 앞서는 구석기 유물을 바라며 조바심이 나던 일본은 결국 2000년 '구석기 유물 심기' 자작극을 벌여 전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몰래 유물을 파묻고 나서 발견한 것인 양 발표했다가 거짓이 들통 난 사건이다.

 

 

 

한반도 구석기 유물의 가치

'집의 물건이 잘못 놓이면 고치고 사람이 잘못되었으면 바로잡고 뜻을 잘못 가지면 다잡는다', 손보기 선생 이름의 의미인데 선생의 업적이 이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 하다. 

손보기 선생은 구석기 유적 발굴 외에도 우리의 금속활자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인정을 받아 우리 선조들의 뛰어난 인쇄 기술을 세계에 알렸다.

 

 

 

100년 전을 알기도 힘든 데 몇십만년 몇백만년 전의 흔적을 찾는 일이 무에 그리 중요한 일일까 싶지만 현재와 미래를 연결해 주는 것은 과거이다.

끊어진 과거를 연결짓지 못하면 현재와 미래가 안정적으로 이어질 수 없다.  

역사는 쉼없이 살아 움직이면서 흘러왔고 흘러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