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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창/느낌있는 여행

공주 무령왕릉 - 웅진 백제시대의 최고 전성기를 이룬 왕

 

공주 송산리에는 6개(1호~6호)의 백제 고분과 무령왕릉이 있다.

앞서 6개의 고분는 일제시대때 발견되어 발굴작업을 벌였으나 이미 심한 도굴을 당해 이렇다 할 유물들은 사라진 상태였으며 고분의 주인이 누구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러다 1971년 7월5일 제6호 고분에 생기는 습기 제거를 위한 배수로 작업 과정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되었다.

 

 

 

무령왕릉은 6호 고분의 현무릉(북쪽 무덤)정도로 인식되어 다행히 도굴꾼들의 눈에 띄지 않아 유물은 물론 주인을 알 수 있는 지석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왕과 왕비의 합장릉으로 백제 문화 연구에 큰 영향을 주기에 충분했다.

 

 

 

백제의 무덤은 구덩이를 파고 시신을 안치하는 움무덤을 비롯하여 옹기에 시신을 넣고 안치하는 독무덤과 돌무더기를 이용한 돌무지무덤, 그리고 구덩이를 파고 내부에 돌을 쌓아 만드는 돌방무덤, 벽돌을 쌓아 만든 벽돌 무덤 등이 있다.

 

 

 

무령왕릉의 경우 벽돌 무덤으로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벽돌에 연화 무늬를 아름답게 넣은 것은 왕의 부활을 기원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무령왕릉이 발견되면서 가장 관심을 끈 것이 무덤 앞에 있던 지석이었다.

무령왕릉 지석은 삼국시대 왕릉급 고분중에서 유일하게 발견된 것으로 왕과 왕비가 죽은 날짜, 그리고 장례절차와 함께 땅의 신들에게 묘지로 쓰일 땅을 사들인다는 매지권이 쓰여 있다.

매지권의 의미 또한 땅의 신에게 죽은이를  보호해 달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무령왕릉은 아치형 입구인 널길을 지나 원형의 내부로 들어가면 널방에 들어선다.

발견 당시 널길에는 생활용품과 진묘수가 놓여 있는데 진묘수는 무덤을 지키는 역할과 함께 죽은이를 하늘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고 믿었다.

 

 

 

 

무령왕릉에거 출토된 유물들은 총 4,600여점에 이르는데 왕과 왕비의 금제 장식을 비롯해 금귀걸이, 은팔찌, 각종 생활용품들이 원형 그대로 발견되어 그 중 12종목 17건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501년 동성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무령왕은  혼란스런 정국을 안정시키고 수리 시설을 확충해  농업을 발전시켰으며 고구려에 빼앗겼던 한강 이북의 일부를 되찾고 스스로 '여러차례 고구려를 격파하여 다시 강국이 되었다'는 선언을 하기도 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장이 8척이고 눈매가 그림같고 인자하고 너그러워 민심이 따랐다'고 무령왕을 표현한 것으로 미뤄 그는 백성들이 꼭 부활하기를 바랐던 존경받는 행복한 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