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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 열사의 병천면 용두리 생가

 

유관순 열사의 병천면 용두리 생가

1919년 3월13일, 18살 꽃다운 나이의 유관순은 비장한 얼굴로 천안행 기차에 몸을 싣고 고향인 병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지난 3월1일 고종의 국상 때 서울 장안에서 벌어졌던 독립선언서와 만세 사건으로 학생들이 동조하는 모습을 보이자 일본 경찰은 전국에 휴교령을 내렸기 때문에 학교에 있지 못하게 되자 고향에 내려가는 길이었다.

 

 

 

고향에 내려와 부모님을 비롯해 마을 어른들에게 서울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가슴 속에 몰래 품고 있었던 독립선언문를 보여  드리며 고향에서의 만세 운동을 도모하였다.

 

 

 

 

1919년 4월 1일로 날을 잡고 태극기를 만들어 만반의 준비를 하고 전날 봉화를 올려 멀리 있는 이들에게 계획을 알렸다.

아우내장이 서는 날, 유관순과 아버지 유중권, 삼촌 유중무와 조인원, 그리고 오빠 유우석등은 준비해간 태극기를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경찰은 소총으로 시위대를 위협하다가 발포하였으며 이 날 유관순의 부모를 비롯한 19분이 순국하고 30여명이 큰 부상을 당하였다.

 

 

<유관순 부모의 묘>

 

주동자로 체포된 유관순은 공주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5월 9일에 공주지방법원에서 5년형을 언도받고 다시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언도 받았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하면서도 만세운동을 주도하여 일본의 무자비한 고문에 가녀린 소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만세를 외치는 목소리와 일본을 꾸짖는 목소리는 서대문형무소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1920년 9월 28일, 19세의 나이로 순국한 유관순의 시신을 몰래 감추려 했던 일본 경찰은 당시 이화학당의 지속적인 요구로 학교측에 인계되었고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후 다시 미아리로 이장된 후 소실 되었고 고향에 초혼묘가 봉안되어 있다.

 

 

 

1951년 유관순은 비폭력 독립운동을 한 업적이 인정되어 순국열사로 선정되고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고향인 병천면 용두리에는 유관순 열사의 생가와 함께 동생이 거주하며 생가를 관리하던 한옥이 지금은 빈 채로 남아 있어 쓸쓸함을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