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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Interest

나폴레옹의 키가 작지 않았다고?


일반적으로 알고있는 상식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배운 것 들이다.
그리고 일부는 잡학다식한 주위의 상식맨, 아니면 다양한 활자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들이다.

그러한 상식들에 대해서는 당연히 역사적 정설로 알고있지만, 실제는 잘못된 역사적 사실도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아래의 내용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진실로 알고있는 역사적 사실들이다.

☞ 간디는 비폭력 평화주의자이다.

☞ 링컨은 노예해방론자이다.
☞ 링컨의 케티즈버그 연설은 순수창작이다.
☞ 진시황제는 분서갱유를 저질렀다.
☞ 콜럼버스의 달걀이야기는 순수창작이다.
☞ 고려시대에는 고려장이 행해졌다.
☞ 원효는 해골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
☞ 홍길동은 가상인물이다.

그런데 역사적 사실로 알고있는 위의 내용이 실은 잘못된 상식이라면 이를 굳게 믿어왔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척 허탈할 것이라 생각된다.

과연 내가 잘못알고 있는 역사의 사실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번 글에서는 잘못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들 중에서 많이 알려진 몇가지 내용들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나폴레옹의 키가 작다

나폴레옹(1769~1821)하면 키 작은 남자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야말로 나폴레옹하면 '작은 고추가 맵다'는 말에 상징적인 인물로 인식되어 있다.  

하지만 나폴레옹의 키는 생각만큼 작지 않았다.
180cm는 안됐지만 그래도 그 당시로서는 평균 키에 해당하는 169cm였다.

솔직히 지금도 그 정도의 키면 아주 작은 키는 아니다.
이 글을 읽는 남자분들 중에도 나폴레옹보다 키가 작은 분이 없진 않을거라 생각된다.

그렇다면 나폴레옹은 우리에게 왜 그렇게 단신으로 기억된 걸까?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일단은 나폴레옹을 경호하던 황실 근위병들의 키가 너무 컸다.
그 속에 나폴레옹이 있었으니 당연히 나폴레옹의 키는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진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나폴레옹 사망 직후 부검의가 공식적으로 발표한 나폴레옹의 키가 그것이다.
그에 따르면 나폴레옹의 키는 5피트 2인치였다.
이 수치를 cm로 환산하면 고작 158cm에 불과하다.

부검의는 나폴레옹의 키를 왜 그렇게 작게 발표한 것일까?
이 같은 오해가 발생한 것은 부검의가 예전에 프랑스에서 사용했던 피트로 나폴레옹의 키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옛 프랑스식 피트는 영미식 피트와 길이가 약간 차이가 있는데, 옛 프랑스 피트로 잰 5피트 2인치는 영미식으로 환산하면 5피트 6인치(169cm)에 해당된다.

옛 프랑스 피트로 측정된 나폴레옹의 키가 영미식 피트로 사람들에게 잘못 전달되어 무려 11cm나 작은 158cm로 알려지게 된 것이다.  


만리장성은 달에서 육안으로 보인다

"달에서도 유일하게 보이는 지구의 인공 건축물은 만리장성이다."


1969년 아폴로 11호로 달 착륙에 성공한 닐 암스트롱이 달에서 육안으로 만리장성을 볼 수 있다고 해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이 말은 거짓말로 판명됐다.

중국 최초의 과학연구기간인 중국과학원의 연구팀은 "우주에서 육간으로 만리장성은 볼 수는 없고, 위성의 원격탐지 기능에 의해서만 만리장성의 영상을 얻을 수 있다."라고 결론 지었다.

또 중국의 첫 우주인인 양리웨이 역시 2003년 11월 우주선 선저우 5호의 지구 귀환 이후,
우주 비행 중 만리장성을 육안으로 보았느냐 기자의 질문에 "볼 수 없었다."라고 답해 중국인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문익점은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왔다

흔히 목화씨는 문익점(1329~1398)이 원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중국의 강남 지방에서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한 뒤, 귀국길에 붓두껍에 몰래 숨겨온 것이라 한다.

하지만 목화씨는 당시 국외 반출 금지 품목이 아니었으며, 문익점이 목화씨를 몰래 붓두껍에 감춰 들여온 것도 사실이 아니다.
게다가 문익점은 강남에서 귀양살이를 한 적도 없다.


『고려사』나 『태종실록』어디에도 문익점이 목화씨를 붓두껍에 숨겨 왔다는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며, 단지 '얻어 갖고 왔다'거나 '주머니에 넣어 가져왔다'고 나올 뿐이다.

문익점이 강남에서 귀양살이를 한 뒤 귀국길에 목화씨를 붓두껍에 감춰 들여왔다는 이야기는 소위 성공신화처럼 부풀려지고 미화된 것이다.

처음 그 같은 이야기가 등장한 것은 문익점이 활약했던 시기보다 한참 뒤인 1819년, 남평 문씨 문중에서 간행한 『삼우당실기』에서다.
 

함흥차사는 사실이다

조선태조 이성계(1335~1408)가 두 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에 분노하여 함흥으로 가버린 뒤, 태종 이방원이 아버지 태조의 노여움을 풀고자 함흥으로 사신들을 보냈으나 태조는 아들이 보낸 사신을 죽이거나 잡아 가두어 보내지 않았다.


이에 한번 가면 깜깜무소식이라는 고사의 기원이 된 것이 함흥차사 이야기다.
그런데 사실 이는 어느 정도 부풀려진 것이다.

먼저 함흥차사로 간 사람들 가운데 죽임을 당한 사람은 박순과 송유 둘 뿐이다.
그 둘도 이성계가 아니라 조사의가 이끄는 반란군에 의해 죽었다.

물론 조사의의 반란이 이성계의 암묵적 동의하에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성계가 직접 죽인 것은 분명 아니었으며, 차사를 죽이는 것이 이성계의 뜻이 아니었음은 송유 다음의 차사들이 모두 무사했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함흥차사의 이야기가 과장된 것은 훗날 박순의 후손들이 시호를 청하면서 올린 시장(상황을 작은 글)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이밖에도 잘못알고 있는 상식들은 의외로 많이 있다.
이처럼 역사의 진실이란 한 꺼풀 벗겨보면 그 속에 놀라운 진짜 역사의 진실이 숨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으로는 상식으로 알고있는 역사적 상식도 다시 한번 색안경을 쓰고 봐야할 지 걱정이다.
역사의 기록도 사람에 의하여 이루어지기 때문에, 역사를 기록하는 사람의 이해관계가 객관적이지 않을 수도 있음을 생각해 보면 일면 이해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