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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북학의 꿈을 지녔던 비운의 왕세자, 소현세자


조선왕조에서 가장 억울한 비운의 왕세자로 회자되는 인물은 다름아닌 소현세자이다.

소현세자와 관련한 가장 큰 의혹은 바로 그의 죽음에 있다.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주장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소현세자에 의문의 죽음


소현세자는 1612년(광해군 4년) 1월 4일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부친이 왕위에 오르자 14세의 나이로 세자에 책봉되었고, 1627년 강석기의 딸을 세자빈(강빈)으로 맞았다.

병자호란정축맹약에 따라 1637년(인조 15) 2월 8일 아우인 봉림대군(훗날 효종)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 갔다가 8년만에 귀국했지만, 귀국한지 불과 두달만에 사망하였다.

오한이 나 병을 치료받은지 불과 4일 만이었고 34세의 젊은 나이였다.





세자가 병이 났는데, 어의 박군이 들어가 진맥을 해보고는 학질로 진찰하였다.
약방이 다음날 새벽에 이형익에게 명하여 침을 놓아서 학질의 열을 내리게 할 것을 청하니,
왕이 허락했다.
   <인조23년 4월 23일, 인조실록 권46>

인조실록의 편찬자가 소현세자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면서 조소용(인조의 애첩)이 세자 내외를 평소 인조에게 모함했던 일을 함께 거론한 것은 결코 우연은 아닐 것이다. 


돌연사에 가까운 소현세자의 죽음을 대하는 인조의 태도는 더 의아스럽다.
대신들이 의원 이형익을 국문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여러번 간청했으나, 인조는 그런 일은 다반사이므로 굳이 처벌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게다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례마저 거의 박대하는 수준으로 간소하게 치렀으며, 그 예법마저도 세자의 지위에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소현세자와 인조의 반목

1645년 소현세자가 8년 만의 오랜 인질생활을 끝내고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돌아오자, 2인자이자 차기 왕인 그의 귀국을 반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소현세자에 대한 청나라의 호의적인 입장과 신뢰는 인조를 비롯한 조정 대신들에게는 결코 달갑지 않았으며, 소현세자가 왕이되면 인조와 서인 정권이 추진한 승명반청 정책이 퇴색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조정 관료 대부분은 남한산성의 치욕을 안겨준 청나라를 현실의 군사대국, 문화대국으로 보지 않고 여전히 오랑캐로 인식하는 분위기였다.

따라서 청의 과학기술 수용에 적극적이었던 세자는 경계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인조는 청이 자신을 물러나게 하고 소현세자를 왕으로 삼으려는 움직임을 경계했다.
정통으로 왕위에 오르지 않고 쿠데타로 집권한 왕으로서 본능적으로 왕위 유지에 집착하면서 아들까지도 경쟁자로 본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왕세자로서 국가경영을 고민하고 탁월한 외교감각을 지녔던 소현세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까?

인조의 뒤를 이어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하면서 청을 물리쳐야 한다는 '북벌'이 국시(國是)로 자리잡은 것은 효종과 서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경기도 고양시 소경원, 소현세자의 묘(청의 심양을 바라보는 북향임)

소현세자가 심양의 인질생활 속에서 습득하고 추구했던 새로운 과학기술과 문명의 수용, 즉 북학의 꿈은 그의 죽음과 함께 묻혀버리고 말았.

 

양녕대군을 폐세자시킨 태종의 냉철함이 세종대왕이라는 조선왕조의 걸출한 왕을 있게 했다면, 반정이라는 쿠데타로 즉위한 인조의 행동은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아쉬울 수 밖에 없는 대목이다.

소현세자의 불행은 그가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인조는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해야 하는 법을 어기고 봉림대군(소현세자의 동생)을 세자로 책봉했다.

봉림대군이 세자로 책봉되는 것은 세손인 소현세자의 아들과 강빈에게는 불행을 의미했다.
왕위 계승자가 제대로 왕위를 오르지 못하면 그 끝은 죽음이기 때문이다.

인조가 소현세자를 독살했다는 확증은 없다.
그러나 소현세자 죽음을 둘러싼 여러 정황들이 충분한 개연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많은 역사학자들도 그렇게 추측하는 것이다.

청에서 돌아온 소현세자와 인조의 마찰이 계속되었다는 점, 어의와 관련된 이해되지 않은 문제들, 소현세자가 죽을 당시의 증세, 세자의 죽음임에도 불구하고 3일상으로 장례를 치룬 점(보통은 3년상), 소현세자가 죽은 후에 그의 처와 아들들(3명)까지 모두 죽여버렸다는 점 등이다.

                          ▲ 소현세자의 아들 경선군묘(오른쪽은 둘째인 석린)로 소경원 근처임

다음은 뒤주에 갖혀 최후를 맞았던 비운의 왕세자인 사도세자에 대하여 알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