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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뒤주에 갇힌 비운의 왕세자, 사도세자


사도세자(1735 ~ 1762)는 영조가 42살에 늦게 얻은 귀한 자식이다.
영조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영빈() 이씨()이다.

본관은 전주(), 이름은 이선(愃), 자는 윤관(), 호는 의재()이다. 

이복형인 효장세자가 죽고 마흔이 넘어 얻은 자식이기에 2세때 왕세자로 책봉되고, 10세때 혼인하였다.

그의 부인은 영의정 홍봉한의 딸인 혜경궁홍씨이다.





영조의 분노와 사도세자의 반발


어릴 때부터 영특하단 소릴들었던 사도세자는 3세때 이미 부왕과 대신들 앞에서 '효경'을 외우고, 7세때 '동몽선습'을 떼었다.

그리고 10세 때에는 이미 정치에 대한 안목이 생겨 집권세력인 노론들이 처결한바 있는 신임사화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1749년(영조 25)에 부왕을 대신해 대리청정하게 되자, 그를 싫어하는 노론들과 이에 동조하는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문씨 등이 영조에게 무고를 하였다.   
경륜이 부족한 세자가 국정 운영에 미숙한 것은 당연할텐데, 성격이 과격한 영조는 수시로 세자를 불러 크게 꾸짖으니 마침내 세자는 희귀한 정신질환을 앓게 된다.

1752년에는 세자가 멋대로 일을 처리했다고 영조가 진노하자 세자는 홍역에 걸린 몸으로 사흘이나 눈 속에 꿇어앉아 용서를 빌어야 했다.

이처럼 영조의 질책이 심해지면서 세자는 부왕에 대한 큰 공포심을 갖게 되었고, 그럴수록 사도세자는 노골적으로 영조에 반발했다. 

사도세자의 비행은 도를 넘는 행동이었으며, 기록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함부로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입궁시키며, 한 나라의 서정을 맡고서도 몰래 왕궁을 빠져나가 평양을 내왕하는 등 난행과 광태를 일삼았다. <출처 : 혜경궁홍씨의 한중록에서>

사도세자의 정신질환에 대해 장인인 홍봉한은
"무엇이라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병이 아닌것 같은 병이 수시로 발작환다."고 하였다.
이병은 격간도동이라는 정신질환이다. 



뒤주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세자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질 즈음 때마침 나경언의 고변 사건이 일어났다.

1761년 계비김씨의 아비인 김한구와 그 일당인 홍계희.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였다.
이는 세자가 자기 대신 내관을 방에 앉혀놓고 20일 동안 평양을 몰래 다녀온 것이 발각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의 일이었다.

1762년(영조 38) 윤5월 12일 오후 세자를 창경궁 휘령전(현재의 문정전)으로 나오도록 하라는 영조의 명이 떨어졌다.



영조는 칼을 휘두르며 자결할 것을 명했다.
하지만 세자가 끝내 자결을 하지않자, 그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 속에 가두어 8일 만에 죽게 하였다.

이 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그가 죽은 뒤 영조는 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의미로 그에게 '사도'라는 시호를 내린다.

▲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융건릉(사도세자와 정조의 능)

이 후 그의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장헌'으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1899년 고종때 '장조'로 추존되었다.
그의 무덤은 처음에 경기도 양주 배봉산 아래에 있다가 정조 때 수원 화산으로 이전되어 현륭원이라 하였다가 장조로 추존된 뒤에 융릉으로 정해졌다. 



영조는 왜 자신의 아들을 뒤주에 가둬 죽였을까?

사도세자가 영조에게 미움을 받아 죽임을 당한 이유로 노론의 부도덕한 정치로 보는 견해가 많다.
세자의 정치를 반대하는 노론과 이에 동조하는 정순왕후와 숙의문씨 등이 영조에게 사도세자를 무고하였으며, 나경언을 통해 사도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한 것이다.

또 다른 견해는 영조 자신의 집권욕이 빚은 비정한 사건일 수도 있다.
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혐의를 받았던 영조는 자신이 왕위에 연연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세자에게 대리청정이라는 정치적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영조는 조선시대 최장수 왕(83세)이자 최장기 집권(52년)을 한 왕이었다.

왕위가 세습되던 시절, 장수는 장기집권의 최고 비결이었다.
영조의 이례적인 장수가 결국은 사도세자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비극을 낳은 근본 원인은 아닐까?
소현세자와는 달리 손자인 정조에게 왕위가 이어진 점도 이러한 추론을 가능케 한다.

이유가 무엇이든 28세의 젊은 나이에 깜깜하고 좁은 뒤주속에서 죽음를 맞은 사도세자의 최후에 비탄함을 금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