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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다시보는 한국사(1) - 고대국가와 삼국시대


초등학교부터 국사라는 과목으로 많은 시간동안 한국사를 배워왔다.
그러나 한국사를 단지 시험을 위한 지식으로 단편적으로 외워왔기 때문에 늘 어려운 암기과목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물론 국사를 가장 좋아했던 분들도 계셨을 것이다)

이제는 시험을 위한(?) 역사공부가 아닌,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함께 숨쉬는 숲으로 한국사를 느껴보는 것도 재밌는 시간이 되리라 생각한다.
앞으로 몇 차례의 연재를 통하여 고대 단군조선부터 1980년대 6월 항쟁까지 오천년 한국사에서 일어난 몇몇 사건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물론 사건 선정의 기준은 임의로 하였음을 알려둔다)



고대국가와 삼국시대

기원전 2333년 단군에 의해 고조선이 건국된 이래 한반도를 비롯하여 만주 지역까지 우리 역사상 초기 국가들이 성립되었다.
이들 중 중앙집권 국가를 성립한 것은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으로, 이때를 삼국 시대라 부른다.

삼국은 때로는 친선관계를 도모하고, 때로는 전투를 벌이며 서러의 영토를 침범하고 빼앗기기를 거듭하였다.
그리고 7세기, 마침내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고 만주에서는 발해가 성립되면서 남북국 시대를 이루었다.


고조선과 한나라 전쟁(BC108년)

 


단군조선은 기원전 2333년 단군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했다는 단군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기자조선은 '삼국유사'에 의하면 기원전 1100년에 중국 은나라가 멸망할 때 망명한 기자가 세웠다고 한다. 다만 기자조선은 그 역사적 실체에 대해서 부정되고 있다.
그 뒤를 이은 것이 위만조선이다.

위만조선은 한나라 초기에 연나라 사람 위만이 고조선 땅으로 이주해 세운 나라이며, 왕검성 전투 당시 위만조선을 이끈 우거왕은 위만의 손자이다.
위만은 연나라 사람이라고 기록되었지만, 고조선에 들어올 때 상투와 고조선 복장을 하고 있었다는 점을 볼 때 고조선계 유민일 가능성이 높다.

중국의 강력한 정복 왕조인 한나라는 전국시대의 혼란이후 중국 최초의 통일 왕국인 진에 이어 두번째 등장한 국가이다.
기원전 141년에 왕위에 오른 한무제는 위만조선으로 눈길을 돌렸다.
당시 위만조선은 동북아시아 역내의 중계무역으로 경제적 이득을 챙기며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었고, 우거왕은 발달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강력한 군사력까지 겸비했다.

한으로서는 흉노(몽골)가 만주로 세력을 뻗어 위만조선과 제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우려하였다.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국제 정세를 둘러싸고 양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자 결국 한무제는 고조선 침공을 감행했다.

위만조선은 비록 내부 분열로 무너지긴 했지만, 중원의 최강자를 상대로 1년이 넘도록 굴복하지 않고 격전을 치렀다.
위만에서 그의 손자 우거왕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한은 왕검성을 중심으로 지방 통치기구인 낙랑군을 설치했다.
또 위만조선의 영토였던 지역에 진반군, 임둔군, 현도군을 두어 직접 통치에 나섰다.

한사군은 고조선 유민들과 고구려 세력에 의해 차츰 폐지되거나 흡수됐다.
낙랑군은 마지막까지 남았으나, 313년 결국 고구려에 의해 멸망했다.


강력한 고대국가를 향한 고조선의 열망은 한사군을 중심으로 한 중국 세력의 축출과 부여, 옥저, 동예, 고구려, 삼한 등의 성장, 각축으로 이어졌다.

이 때가 바로 우리민족의 터전이 형성되어 가던 시기였다.



광개토대왕의 낙동강 전투(400년)

지금부터 1600여년 전인 400년, 한반도의 남쪽 낙동강 유역에서는 고구려와 백제-가야-왜 연합군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 결과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고구려에 의해 섬멸됐다.


바로 끊임없는 정복 사업으로 고구려의 영토를 넓히고 최고의 전성기를 이룬 광게토대왕 시절이다.
고구려 19대 왕인 광개토대왕의 낙동강 전투는 당시 한반도 내 국가들의 정세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낙동강 전투는 왜의 침략을 받은 신라 17대 내물왕이 고구려에 도움을 청하면서 비롯됐다.
한반도에서 세력이 약해진 백제가 왜와 더욱 가까워지자,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광개토대왕이 신라의 파병 요청을 계기로 낙동강 일대를 평정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한반도내의 세력 판도가 고구려 중심으로 재편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신라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으며 서서히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데 힘을 쏟을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의 이름은 담덕이며, 사후 시호는 국강상 광개토경 평안호태왕, 생존 시의 칭호와 연호는 영락이다.
고구려에서는 왕의 특징에 따라 그 이름을 지었다.
따라서 광개토대왕이라는 이름만큼 그는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정복 군주로 기록된다.

광개토대왕이 왕성한 정복 사업을 벌이며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끌 수 있었던 것은, 그보다 앞선 왕들이 착실하게 나라의 기반을 쌓아 나갔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선대의 국왕들이 탄탄하게 다져온 기틀 위에서 광개토대왕은 거의 평생을 정복 사업에 매진하며 고구려를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시킬 수 있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은 '나라가 부강하고 백성이 편안했으며, 오곡이 풍성하게 익었다'라고 당시 상황을 적고 있다.


다음 글에서는 고려시대의 주요 사건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자료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