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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폭정으로 치닫던 연산군의 최후, 갑자사화



지난 글 '사화로 본 조선의 왕권'에서 살펴 본 무오사화는 정국의 주도권을 연산군과 훈척 세력에게 넘겨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무오사화로 사림파가 제거되자 조정에는 언론 기능이 상실됐고, 연산군은 날마다 연회를 열어 전국의 기생들을 불러 모았으며, 향락과 패륜을 일삼았다.
방탕하고 사치스런 생활로 급기야 국고가 바닥날 지경에 이르자, 연산군은 훈신들에게 공신전을 내놓으라고 요구했으며 노비를 몰수하기도 했다.

▲ 원각사지 10층 석탑 : 현재 탑골공원 자리에 1465년 세조 때 세워진 원각사가 있었다. 그러나 1504년 연산군은 이 절을 폐하고 연방원이라는 기생집으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절은 없어졌으나 탑만은 아직까지 남아있다.

이즈음에 훈척 세력은 척신 중심의 궁중파와 의정부, 육조에 포진한 훈신 중심의 부중파로 나뉘었다.
부중파(훈신)는 처음에는 궁중파(척신)처럼 연산군의 행태를 방관했으나, 공신전을 요구받으면서 연산군에게 불만을 갖는다.
당자 자신들의 경제적 토대가 무너질 것을 우려한 부중파는 연산군에게 향락 생활을 자제할 것을 간청하기도 했다.

연산군과 부중파가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빚자, 이번에는 궁중파가 이를 이용해 부중파를 제게할 음모를 꾸몄다.
이들이 들고 나온 것은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비, 사사문제였다.
생모 윤씨는 투기를 부려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남기는 바람에 폐비가 된 뒤 사약을 받고 죽었다.

윤씨의 폐비론을 가장 강력하게 들고 나왔던 사람은 윤씨의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였다.
윤필상 등 훈구 세력도 이를 강력하게 지지했고, 김종직 문하의 사림 세력까지 폐비론에 가세했다.

생모 폐비에 대한 전말이 연산군에게 밀고되자, 그 후폭풍은 엄청났다.
연산군은 무오사화 때보다 훨씬 많은 인사들을 처단했다.
윤씨 폐출에 관여한 후궁들을 참하고, 인수대비를 때려 죽게 했다.
윤씨의 폐비와 사사에 찬성하거나 이를 방관한 윤필상, 이극균, 성준, 김굉필, 등 10여 명을 사형하고, 한명회, 정창손, 정여창, 남효온 등을 부관참시*했다.
(*부관참시(剖棺斬屍) : 이미 매장된 사람의 무덤을 파내 관을 부수고 그 시체를 참수하는 형벌)

연산군의 숙청 작업은 무려 7개월 동안이나 계속되었는데, 이를 두고 갑자사화라 한다.
갑자사화는 왕을 중심으로한 궁중 세력과 부중 세력(훈신)의 대립으로 일어난 것으로, 이를 통해 연산군은 훈신 세력과 잔여 사림 세력을 한꺼번에 제거했다.


갑자사화 이후 연산군은 폭정은 극에 달했다.
연산군의 폭정이 극에 달하자, 그를 몰아내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연산군의 행태를 비판하다 한직으로 좌천된 전 이조참판 성희안이 1506년에 마침내 거사를 실행하였다.
군사를 일으킨 뒤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위로 올렸다.
이가 바로 조선 11대 임금인 중종이며, 이를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결국 연산군은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돼 강화도 교동으로 추방됐으며, 그 해(1506년) 병으로 죽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연산군에 대한 평가는 이미 그 당대에 확고히 내려졌다.
일반적인 국왕에게 부여되는 ‘조’나 ‘종’이 아닌 ‘군’이라는 묘호가 붙여졌고 그의 시대를 다룬 기록은 ‘실록’이 아니라 ‘일기’로 불렸으며, 종묘에서 배제되고 격식을 갖춘 ‘능’이 아닌 초라한 ‘묘’에 안치되었다는 사실은 부정적 평가를 대표하는 외형적 상징들이다.

조선왕조에서 신하들이 반란을 일으켜 왕을 바꾼 첫 번째 사건이다.
왕조를 바꾸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역성혁명과는 차이가 있다.


갑자사화의 역사적 의미


갑자사화 이후 폐위되기까지 2년 반 동안은 그야말로 극심한 폭정이 휩쓴 황당한 시간이었다.
 

역설적으로, 그 시기에 연산군은 모든 행동을 제약받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갈망한 전제 왕권을 온전히 구현할 수 있었지만, 수많은 편집증적 심리와 행동에서 보이듯이 그의 내면은 엄청나게 파괴되어 있었다.

능상의 척결을 목표로 삼사를 포함한 신하 전체를 길들이려는 연산군의 시도는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이런 실패는 물론 쓰라린 상처였지만, 중요한 교훈과 영향을 남겼다. 
두번의 사화를 거치면서 결과적으로 삼사의 위상이 더욱 공고해지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후 기묘사화(중종 14년, 1519)가 보여주듯이 삼사의 기능이 완전히 정착되기까지는 아직도 험난한 과정이 남아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왕조가 경험한 초유의 정치적 파탄은 훈척 세력과 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국왕이 군림하는 수준 높은 유교정치가 현실에 더욱 원숙해지는 성장통이었다.
이 시기의 시련과 극복은 이런 측면에서 그 역사적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