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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조선왕릉 이야기(5) : 효릉(인종), 강릉(명종), 목릉(선조), 광해군묘(광해군)


궁궐에 가면 외전(정치공간)의 중심은 정전이다.
정전을 들어가는 문(예를 들어 창경궁의 경우는 정전인 명정전을 통과하는 문의 이름은 명정문임)을 통과하면 길게 3갈래의 길이 나타난다.


이를 조정이라 한다. 
사극을 보면 신하들이 궁궐에 입궐하는 행위를 '조정에 나간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조정은 가운데가 임금이 지나는 길, 좌측이 문관 우측이 무관의 길이다.
이 중 임금이 지나는 길이 좌우측보다 조금 높게 나있는데, 이를 임금의 길 어도(御道)라 한다.

마찬가지로 왕릉에 가도 임금의 길이 있다.
살아있는 임금은 한 나라의 최고 위치에 있다.
하지만 그런 임금도 왕릉의 홍살문을 통과하는 순간 두 번째 지위가 된다.


왕릉 공간에서 최고 위치는 바로 왕릉의 주인인 승하한 왕이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임금이 사는 궁궐에서 임금의 길을 '어도'라 하는데, 왕릉에서 임금의 길은 '참도'라 한다.
참도는  왼쪽이 오른쪽보다 높게 되어 있다.
높은 곳은 혼령이 걷는 길이고, 낮은 곳은 참배를 간 살아있는 임금이 걷는 길이다.


제12대 인종 : 효릉

위치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 38-4번지 / 사적 제200호 / 1545년(명종1) 조성

조선 제12대 인종과 인종의 비 인성왕후의 쌍릉으로, 효성이 지극했던 인종을 기려 능호도 효릉으로 정해졌다.
부모 옆에 묻어달라는 인종의 유언에 따라 부왕인 중종과 어머니인 장경왕후의 능인 정릉 옆에 조성하였으나, 1562년(명종17) 정릉이 지금의 강남구 삼성동 선릉 옆으로 옮겨갔고, 장경왕후의 능은 희릉이라는 능호로 바뀌어 효릉 옆에 있다.


제13대 명종 : 강릉

위치 : 서울시 노원구 공릉동 223-19 / 사적 제201호 / 1567년(선조1) 조성

강릉은 조선 13대 임금인 명종과 비 인순왕후의 능으로 쌍릉으로 조성되었다.
명종은 인종의 갑작스런 승하로 12살에 왕위에 오른 이복동생(경원대군)이다.

당시의 소문에는 문정왕후가 독살로 양아들(인종)을 죽이고 친아들(명종)을 왕위에 앉혔다고 한다.
결국 명종은 문정왕후가 살아있을 동안은 형식적인 왕이었고 모든 권한은 대비 문정왕후에게 있었다.


제14대 선조 : 목릉

위치 :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3(동구릉) / 사적 제193호 / 1600년(선조33) 조성

동구릉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목릉에는 14대 선조와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가 안장되어 있다.
목릉의 영역은 원래 1600년(선조33) 의인왕후가 승하하자 왕비릉인 유릉의 터로 정해진 곳이다.

그런데 1608년(광해군 즉위) 선조 승하 후 선조의 능인 목롱은 원래 건원릉 서편에 조성되었는데, 물기가 차고 터가 좋지 않다는 상소에 따라 1630년(인조8)에 지금의 위치로 천장되고 유릉과 목릉을 합쳐 목릉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1632년(인조10)에 선조의 계비 인목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계비의 능을 왕릉의 동편 언덕에 조성하여 지금의 세능이 자리하고 있다.


제15대 광해군 : 광해군묘

위치 :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 59 / 사적 제363호 / 1643년(인조21) 조성

조선 제15대 광해군과 문성군부인 유씨의 무덤으로, 난간석이나 석물 등이 없으며 초라하기 그지없다.
인조반정으로 폐위된 광해군은 유배지인 제주도에서 사망한 뒤 그곳에 묻혔다가 1643년 지금의 경기도 남양주시로 이장되었다.

광해군의 부인인 문성군부인 유씨 역시 광해군과 함께 폐위되어 강화로 유배되었다가 사망하여 양주군 적성동에 묻혔는데, 광해군이 사망한 뒤 광해군의 무덤 옆으로 이장되었다.

17세기 급변하는 중국의 정세를 유일하게 궤뚫어본 임금 광해군은 혼란 속에 오직 조선의 살 길을 모색하여 미래를 준비하려 했던 인금이다.
그러나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기에 그를 평가받지 못한 폐주로 기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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