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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야사로 본 고구려 건국이야기



고조선의 건국신화뿐 아니라 삼국시대의 역사 또한 정사와 야사로 명확히 구분하기는 애매하다.
삼국시대에 대한 이야기들의 대부분 출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이다.
삼국시대의 역사를 정사와 야사로 구분하는 기준은 이야기의 출처가 삼국사기인지 아니면 삼국유사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정확하게는 두 책 자체를 정사와 야사로 구분하기에는 애매한 면이 많은 것 또한 사실이다.

그래도 두 책을 정사와 야샤로 구분하는 이유는 삼국사기는 고려조정에서, 삼국유사는 개인이 편찬하였기때문이 그 이유의 전부라 할 수 있다.


하여튼 삼국시대에 대한 역사는 정사와 야사를 구분하는게 큰 의미를 두지 않는게 맞겠다.
이번 글에서는 야사인 삼국유사에 나타난 고구려의 건국 과정을 알아보도록 하자.


고주몽의 탄생설화

주몽은 졸본부여의 임금 고두막루와 비서갑 하백의 딸 유화사이에서 태어났다.
비서갑이란 큰 강이나 하천을 관리하는 장관을 말한다. 그래서 하백을 용왕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그리고 고두막루의 조부 동명왕 고진은 단군조선 고열가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고두막루는 태자 고무서에게 나랏일 맡겨놓고 거수국(제후국) 순행을 나섰다.
먼저 찾은 곳은 가섭원으로, 즉 동부여이다.
동부여는 북부여에서 쫓겨난 해부루가 터를 잡았고, 이때는 2대 금와왕이 다스리고 있었다.

고두막루 일행은 동부여의 알하수 변에 이르러 잠시 쉬었다.  그때 알하수의 바위 틈으로 목욕하는 아가씨의 모습이 고두막루의 눈에 들어왔다. 비서갑 하백의 세 딸 유화(버들꽃), 훤화(원추리꽃), 위화(갈대꽃)였다. 고두막루는 특히 눈에 띄는 맏이 유화를 불러 천황의 위엄으로 범하고 말았다.

유화는 이 사실을 아바지에게 알릴 수 없었다. 아무리 천황일지라도 부정을 저질러놓고 무사할 수가 없었다. 고두막루는 서둘러 동부여를 떠나면서 유화에게 징표를 주었다. 천황검이었다.
"만약 잉태하여 사내아이를 낳거든 이 칼을 갖고 나를 찾아오도록 하라."

이후 하백에게 임신 사실이 들킨 유화는 쫓겨나 정처없이 떠돌다가 동부여 병사들에게 발견되어 궁궐로 끌려갔다. 금와왕은 병사들이 데려온 유화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으나 유화는 입을 다물고 벙어리 행세를 했다. 이에 화가 난 금와왕은 유화를 구석방에 감금시켜 버렸다.

몇 달이 지나 이상한 소문이 궁궐에 퍼지고 있었다. 처녀가 커다란 알을 낳았다는 소문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알에서 사내아기가 태어났다는 소문이 궁궐에 다시 퍼졌다. 왕비는 그 아이가 금와왕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기로 오해하여 시녀들에게 아이를 빼았아 돼지우리에 던지라고 명하였다.


시녀들이 유화에게서 아기를 빼앗으려고 하자 그제서야 유화가 울면서 입을 열었다.
"아기에게 손대지 마라! 그 아기는 졸본부여의 황손이니라!."


고구려의 건국

동부여의 금와왕 밑에서 자란 주몽이 일곱 살이 되었다. 이때부터 주몽은 활을 잘 다루었다.
동부여 사람들은 7세의 주몽을 추모라고 불렀다. 추모란 부여말로 활의 명인이란 뜻으로 지금도 몽고에서는 주무라고 한다.이 주무가 이두문으로 주몽으로 읽혀져 고주몽이 된 것이다.



동부여에서는 해매다 추수가 끝난 10월에 하늘에 제사지내고 어전에서 활쏘기.말타기.수렵대회를 열었다. 고주몽은 10세 때부터 이 대회에 나가 단 한번도 우승을 놓친 적이 없었다.
주몽은 이러한 뛰어난 능력은 금와왕의 일곱 왕자 가운데 태자 대소의 미움을 샀다.

그리고 주몽이 19세 되던 해에는 갈사의 왕실 목마장에서 큰 행사가 열렸다.
금와왕이 갈사에 나와 지켜보는 가운데 동부여 전국에서 모여든 영웅호걸들이 무예로 자웅을 겨루었다. 여기서도 많은 경쟁자를 물리친 주몽이 역시 우승을 차지했다.


"고주몽 만세!"
"동부여의 젊은 영웅 주몽 만세!"
이 광경을 지켜보는 대소의 마음이 질투로 가득찼다.
주몽에 불안감을 느낀 대소는 측근을 불러 대책을 숙의했다. 물론 주몽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주몽의 목을 조여오는 죽음의 그림자가 촌각을 다투며 다가오고 있었다.

유화부인은 더는 지체할 수 없어 밤중에 몰래 주몽을 불렀다.
"네 신변에 위험이 닥치고 있다는 것을 너는 알고 있느냐?"
"눈치는 채고 있사오나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나이다." 
"너는 졸본부여의 임금이신 고두막루의 아들이니라. 당장 아버지의 나라로 떠나거라."

유화부인은 항아리에 넣어 담장 밑에 묻어둔 천황검을 꺼내어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은 그제서야 자기가 졸본부여의 왕자라는 것을 확신하고 감격에 겨워 눈물을 흘렸다.

주몽은 어머니와 아내에게 하직인사를 했다. 부인 예씨가 서두를것을 재촉했다.
주몽은 예씨를 쳐다보다가 허리에 차고 있던 짧은 사냥칼을 문지방에 내리꽂아 칼을 부러뜨렸다.

"부인, 내말을 잘 들으시오. 내가 혹여 사정이 여의치 못하여 일찍 올 수 없고 당신이 사내아이를 낳으면
 이름을 유리라 짓고 이 반
 쪽 칼을 주어 나를 찾아오도록 하오.  
 이 칼을 맞춰보아 부자 사이를 확인하겠소."


주몽은 심복인 오이, 마리, 협보를 데리고 동부여를 떠나, 졸본으로 향했다.
이를 안 대소의 끈질긴 추격을 뿌리친 주몽 일행은 곧장 졸본부여의 수도인 아사달로 가지 않고, 북만주 비류수 주변의 흘승홀로 갔다. 그리고 주몽은 흘승홀에서 고두막루의 태자 고무서에게 소외당한 원로 대신을 만났다.

                                  주몽이 고구려 건국할 때 첫번째 성도를 세웠던 졸본성

원로대신들은 주몽이 보여주는 천황검을 보고 고두막루의 아들임을 확인하고 주몽을 임금으로 추대하기로 합의하였다. 이 소문이 졸본부여 사이에 퍼져 아사달까지 번져갔다. 주몽을 따르는 신료들과 백성들이 흘승홀로 모여들었다.

드디어 기원전 58년 5월, 주몽은 하늘에 제사지내고 고구려의 건국을 만천하에 선포하였다.
주몽은 고구려의 연호를 다물이라고 했다. 다물이란 옛 영토를 회복한다는 뜻이다.



주몽의 나이 40세 되던 9월 어느날 하늘에서 졸본땅에 황룡이 내려와 주몽을 태워 하늘로 올라가버렸다.
용을 타고 올라가는 주몽이 그를 전송하는 왕후, 태자, 신하, 백성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태자 유리야! 나는 하늘의 명을 받아 너희들을 떠나간다. 내가 간 뒤에 너는 임금의 자리에 올라 덕으
 로써 나라를 다스릴 것을 
잊지 말아라."  


그리고 옥으로 만든 채찍 하나와 구슬로 만든 신 한켤레를 떨어뜨려 주었다.
유리왕과 백성들은 그 물건을 거두어 용산에 장사지내고 시호를 동명성왕이라 불렀다.
고구려는 주몽이 세웠지만 주몽 자체가 수수께끼 인물로 남아 신화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