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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풀지도 못한 신혼여행 가방, 한 맺힌 제주도

 

 

제대로 풀지도 못한  신혼여행 가방, 한 맺힌 제주도

 

 

제주도!

아이들도 몇번 씩 다녀왔고 남편도 몇번씩 다녀와서 이젠 볼 것도 없다며 가기 싫어하는 제주도를 나는 딱 한 번 갔었다.

 

 

 

22년전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간 우리는 여느 신혼부부들과 마찬가지로 3박 4일의 꿈처럼 아름다운 신혼여행을 상상하며 도착했지만 나는 신혼여행 3일동안 여행 가방 한 번  제대로 펼치지도 못하고 3군데를 돌아다니며 잠을 자야했다. 그것도 신랑의 눈치를 보면서 말이다.

 

결혼 당일, 폐백 드리고 정장으로 갈아 입을 시간이 없어 원삼 족두리만 빼고 한복을 그대로 입고 공항으로 출발했다. 안그래도 시간이 촉박한데 시내 교통은 시위대 때문에 여기저기 통제하는 곳이 많아서 맘을 졸이며 겨우 공항에 도착했고 드디어 제주를 향해 비행기가 이륙했다.

 

처음 타는 비행기라 설레었지만 안그런 척 표정관리를 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우리처럼 긴장하고 설레이는 신혼부부들이 저마다 '나 행복해요'하는 표정으로 머리를 맞대고 연실 웃으며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다. 비행기는 금세 제주공항에 도착했고  제주 날씨는 생각보다 더웠다.

 

 

제주도에서 첫째 날

 

두꺼운 화장으로 눈은 무겁고 얼굴에 비닐을 한겹 덮어 놓은 듯 답답하고 끈적거려 미칠 지경인데다가 한복이 치렁치렁해서 간수를 못하니 이래저래 몸이 빨리 지쳐갔다. 신랑은 밖에 나가 우리를 마중나온 기사아저씨의 자동차 번호판을 살피느라 나 혼자 공항 안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도대체 왜 한복을 입고 왔을까 후회하며 다음 결혼땐 꼭 정장을 입자 다짐했다. ㅎㅎ

 

 

 

 

기다리다가 드디어 아저씨를 만나 호텔로 향했다.

이미 시간은 10시 가까이 됐고 얼마나 걸리냐했더니 1시간은 가야한단다. 그렇게 멀어요? 되물으니

"서울 사람들이 제주도가 좁다고 아무 산이나 올라가 돌을 던지면 바다에 빠진다고 알고 있는데 제주도 넓~습니다."

 

기분좋은 아저씨의 농담에 한바탕 웃으며 우리는 11시쯤 호텔에 도착했다.

아침 8시에 오신다는 말을 듣고 밤 12시가 다 되서야 호텔 안에 가방을 들여 놓을 수 있었다.

 

 

제주도에서 둘째 날

 

아침에 프런트에 가니 옆에 있는 신라호텔에서 신혼부부를 위한 방송 녹화가 있으니 저녁에 가보시라는 안내를 받으며 일찍 들어와 산책겸 신라호텔에 가보자고 했다. 호텔 앞에 미리 와 있던 기사 아저씨의 입담좋은 설명을 들으며 우리는 처음 구경하는 제주도의 이국적 경치에 푹 빠졌다.

 

그러다가....

남편이 호텔 이야기를 꺼냈다. 다 좋은데 방이 바다쪽이 아니어서 아쉽다고 그러자 아저씨는 그럼 자기가 바다가 보이는 좋은 숙소를 소개하겠다고 했다. 나는 짐을 다시 싸야하는게 싫었지만 바다가 보인다고 하니 남편은 옮기자고 했다.

 

 

 

에휴...그때 고집을 부려서라도 가지 말았어야 했다. 

도착한 그곳은....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단, 바다는 보인다.

'아저씨!! 신혼부부에게 이런 곳을 추천하시다니 이러시면 벌 받아요.'  속으로만 외치며 남편을 쳐다보았다.

 

어이없어 표정이 일그러지는 남편은 폭발 일보직전이다. 일단 아저씨를 보냈다.

다음 날 일정이 남았는지라 아저씨와 감정이 틀어지면 안되겠기 때문이다. 남편은  잠시 생각하더니 공중전화로 가서 좀 전에 나왔던 호텔에 전화를 하여 다시 갈 수 있는지 문의 했다.  이미 체크아웃이 되서 다시 갈 수가 없었고 다른 호텔도 알아보았으나 빈 방이 없다.

 

'그러게 가만 있지 뭐하러 나와가지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내게 이렇다 할 말 한마디 안하고 화를 삭이며 한숨만 내쉬는 남편의 눈치를 보며 제주에서의 두번째 밤을 보냈다.

 

 

제주도에서 셋째 날

 

다음 날 다시 아저씨가 데릴러 왔는데 그 싸한 차 속의 냉기란.... 더불어 날씨도 도와주지 않고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여차저차 여행일정을 생략하고 남편은 다시 공중전화로 가서 제주 시내에 있는 호텔을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주중이 되니 빈 방이 있었고 우리는 3번째 숙소에 가방을 들여놓았다.

 

바다는 보이지 않고 가로등과 화려한 네온싸인이 보이는 호텔에서 아저씨가 만들어 온 신혼여행 앨범을 보았다.  저녁을 먹으러 나가려고 할때 호텔 직원이 9시에 신혼부부를 위한 행사가 있으니 참석하시라 한다. 아쉬움 마음이 많았던지라 기분도 풀겸 실컷 웃고 오자고 했다. 행사의 대상이 신혼부부들이라서 민망한 게임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그동안 우울한 기분을 풀고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기분도 나아졌다.

 

 

 

 

이제 내일은 서울로 가는 날!

 

제대로 가방을 풀어 본적도 없이 싸기 바빴던 제주에서의 3일이었다.

단 하루만 가벼운 마음으로 구경을 했는데 그마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두번 째의 그 방과 비가 오던 날씨, 그리고 완전 뿔났던 남편의 표정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내게는 아쉬움과 한(?)으로 남아있는 제주도이다. 

 

 

이젠 신혼여행이 아니라 그야말로 휴가로 떠나는 여행이 될 제주도에 기필코 꼭 다시 가서, 제대로 가방 풀고 여유있게 구경하고 맘 편히 밥도 먹는 제주 여행을 하고 말 것이다.

 

그 여행길에 남편을 데리고 가야할지는 ....생각좀 해봐야 할 것 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