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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Interest

갈릴레이와 다윈, 영향력있는 과학자는?

 

 

지금 영국에서는 서른 번째 벌어지는 올림픽의 열기로 무척이나 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대한민국의 양궁 스타들, 수영 황제 펠프스, 그리고 펜싱 신아람 등 스포츠 스타들이 매일 언론을 장식하고 있다. 그런데 열대야의 여름밤에 새벽까지 TV 앞에 있다가 출근하자니 컨디션이 말이 아니다.

 

지금부터 3년여 전에 영국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뉴 사이언티스트>는 스포츠가 아닌 과학계의 거물 두 사람에 대하여 인기도를 발표하였다. 갈릴레이와 다윈이 그 주인공인데, 정확하게 말하면 두 사람 중 누가 더 인류에 영향을 미쳤냐는 점을 가린 것이다. 두 사람 다 과학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과학자이기에 그 결과에 관심이 쏠리는 건 어쩔 수 없다지만, 본인들이 이 사실을 안다면 뭐라고 생각했을까 궁금하기도 하다.

 

그럼 왜 이런 이벤트성 기사를 작성하였을까? 

 

 

 

2009년은 두 사람을 기리는 과학계에서는 의미있는 해였다. 천문학 분야에서는 1609년 갈릴레이가 망원경을 처음 사용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400주년 되는 2009년을 '세계 천문의 해'로 제정하여 각종 기념행사들을 개최하였고, 마찬가지로 생물학 분야에서 2009년은 다윈 탄생 200년, <종의 기원> 출간 15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였다.

 

이번 글에서는 과학계의 두 거목이었던 갈릴레이와 다윈에 대하여 후세의 사람들은 어떤 평가를 내렸을 지 알아본다.

 

 

목숨을 구걸한 갈릴레이

 

현대 과학의 시조로 불리는 갈릴레이(1564~1642)는 우주의 비밀을 발견한 이탈리아의 천문학자이다. 1609년 직접 만든 망원경으로 최초로 태양의 흑점을 발견하였고 달 표면에서 산맥을 찾아 내었다. 그리고 은하수가 엄청나게 많은 별들의 집단임을 밝혀냈다.

 

 

 

 

1610년 갈릴레이는 망원경을 통해 발견한 성과를 집대성한 책자를 발표했다. 그리고 그 책에서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1473~ 1543)의 태양중심설이 사실임을 증명하였다. 그때까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무려 1,500년 동안 믿었던 천동설을 부정하였다 하여 카톨릭의 격렬한 저항을 받고 있었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학설을 지지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된다. 1633년 종교재판소는 69살의 노인이며 세계적 명성을 지닌 갈릴레이를 로마로 소환했다. 그해 6월 22일 갈릴레이는 마침내 종교재판에서 지동설이 오류임을 자인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구걸하여 과학의 전통을 더렵혔다는 오명을 쓰고 말았다.

 

 

기독교의 뿌리를 뒤흔든 다윈

 

진화론의 창시자인 다윈(1809~1882)은 영국의 박물학자이다. 다윈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진화의 원동력이 자연선택이라는 결론을 얻었으며, 이는 인류 과학사에서 어느 누구도 제기한 적이 없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자연선택 이론은 1859년 다윈이 펴낸 <종의 기원>의 핵심이자 진화 이론의 기본이다. 다윈의 진화론은 하나의 생물학 이론에 불과하나 19세기 유럽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바꿔말하면 다윈의 진화론은 인간의 지위를 만물의 영장에서 하나의 동물로 격하시켰기 때문이다.

 

 

갈릴레이의 지동설 주장이 지구의 지위를 우주의 중심에서 일개 떠돌이별로 추락시킨 것처럼 진화론 또한 인간이 자연의 일부분에 불과한 존재라는 걸 주장하는 것이기에 종교에 미친 파장은 엄청났다. 결국 진화론은 기독교의 창조론을 뿌리째 흔들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인지 현재에창조론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진화론을 공격하고 있다.

 

 

다시 처음의 얘기로 돌아가 갈릴레이와 다윈에 대한 <뉴 사이언티스트>지의 결론은 어떤지 알아보자.

 

뉴 사이언티스트는 다윈의 손을 들어 줬다.

그 이유는 갈릴레이는 망원경으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입증했을 뿐이지만 다윈은 독창적인 학설을 내놓았다는 설명이다.

 

이 글을 읽는 분들의 평가는 어떨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