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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갑자사화의 연출자, 연산군과 임사홍

 

갑자사화의 연출자, 연산군과 임사홍

 

연산군 시대에 사림은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이러한 사림의 몰락을 역사에서는 사화(士禍)라고 칭한다.

조선시대에 4대 사화 중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연산군 시대에 일어났으니 사림의 입장에서는 이때야 말로 조선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시기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간신배인 유자광과 임사홍이 활개를 치던 때도 이때였으니 이 또한 무슨 역사의 장난이란 말인가연산군 시대 두 번의 사화에 빌미를 제공한 인물이 바로 간신 유자광과 임사홍이었던 것이다.

 

사림의 제거가 직접적인 목적이었던 무오사화와 달리 갑자사화는 훈구(*) 대신들의 제거가 일차적인 목적이었으며 단지 무오사화 때 제거되지 못한 사림들에게도 이 때 또 한차례 피 바람이 일었던 것이다.

 

(*훈구 : 전기 세조의 집권과 즉위 과정에서 찬위(임금의 자리를 빼앗음)를 도와 공신이 되면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한 이후 형성된 집권 정치세력을 말함)

 

 

임사홍의 암울한 시기

 

임사홍은 좌찬성을 지낸 임원준의 아들이며 효령대군의 아들인 보성군의 사위로, 왕실의 사위였다. 게다가 1466년 사재감사정으로 춘시문과를 통과해 일찌감치 벼슬길에 오른 인물이었다. 홍문관 교리, 승지, 도승지,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으며, 중국어에도 능통해 관압사, 선위사 등의 직위로 명나라도 수 차례 다녀왔으며 한동안 벼슬길에 막힘이 없었다.

 

그러던 그가 뜻밖에 사건에 연류되어 유배에 오르는 신세가 되었고, 이를 계기로 성종 시대에는 지독한 암흑기를 보내게 된다. 임사홍이 유배를 가게 된 사건은 현석규 탄핵 사건이었다. 당시 현석규는 효령대군의 손자 서원군의 사위로 도승지를 지내고 있었다.

 

현석규에 대한 성종의 신임이 두터운 것을 시기한 임사홍은 유자광과 손 잡고 일을 꾸민 것이다.

그러나 몇 차례에 걸친 모함과 상소에도 현석규에 대한 성종은 신임은 변함없었고, 결국 계속되는 상소에 화가 치민 성종은 상소의 배후 인물을 캐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잇따른 상소의 배후로 임사홍과 유자광이 드러났다. 성종은 대노하여 유자광은 동래로, 임사홍은 의주로 각각 유배령을 내렸다. 왕실의 사위인 임사홍은 얼마 뒤에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성종은 무고를 일삼은 임사홍을 철저하게 외면하였고, 임사홍은 할 일없이 세월만 낚는 신세로 성종 시대를 보내었다.

 

 

연산군과 임사홍 그리고 갑자사화

 

드디어 때는 왔다. 성종 사후는 연산군의 시대이다.

연산군 때에 임사홍의 아들 임승재는 연산군의 부마가 되었다. 그리고 연산군은 임사홍의 아들을 부마 이상으로 총애하였다. 이러한 임승재에 대한 연산군의 총애는 임사홍의 처지도 달라지게 하였다. 임사홍은 아들의 연줄로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되었으며, 성종 시대 자신을 소인배라고 놀리던 대신들에게 복수 할 기회를 노리게 된다.

 

드디어 권모술수의 대가인 임사홍은 자신을 비난한 자들에게 앙갚음을 할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임사홍은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근과 모의해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윤씨 사건을 보고한 것이다. 연산군에게 신임을 얻으면서 조정의 대신들에게 앙갚음을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마침내 실행에 옮긴 것이다. 임사홍을 통해 폐비윤씨의 전모를 들은 연산군의 두 눈에서 불길이 일었고, 임사홍은 자신의 계책이 성공함을 직감하였다.

 

 

연산군은 생모를 폐비시키는 데 앞장선 대신들과 사사를 주장한 대신들에 대한 철저한 응징에 나섰다. 성종 때부터 조정에 나와 국사를 논하던 대신들은 그 화를 면할 길이 없었다. 심지어는 이미 죽은 자에게도 부관참시(剖棺斬屍 : 이미 매장된 사람의 무덤을 파내 관을 부수고 그 시체를 참수하는 형벌)를 명할 정도로 연산군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연산군의 생모 윤씨에 대한 복수극으로 세조, 성종 때부터 조정에 출사했던 많은 권신들이 죽거나 귀양을 갔다. 상소를 올린 사림계 인사들도 그 화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조정의 훈구 대신들과 사림세력까지 일거에 소탕한 이 사건을 두고 역사는 갑자사화라고 부른다.

 

 

연산군과 임사홍의 최후

 

연산군이 왕위에 즉위한 때는 정치적으로 매우 혼란한 시기였다.  특권관료층에 속했던 훈구세력과 성종 때부터 조정에 출사하기 시작한 신진 사림세력이 정치적으로 대립하던 시기였다. 연산군이 보기에 사림세력이나 훈구세력이나 자신의 뜻대로 나라를 다스리는 데 귀찮은 존재였던 건 사실이다.

 

이러한 연산군의 정치적 입장을 자신들의 출세의 기회로 이용한 인물이 바로 유자광과 임사홍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서로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거래라 볼 수도 있겠다. 두 번의 사화 이후 조정에는 연산군을 견제할 세력이 없어졌으나, 연산군은 이를 자신이 생각하는 정치를 펼치는데 활용하지 않았다.

 

 

▲ 연산군의 폭정을 그린 영화 '왕의 남자'

 

온갖 악행과 학정이 도를 넘자, 연산군을 폐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 것은 역사의 당연한 이치였다. 그리고 제거 대상에는 내시 김자원과 임사홍, 신수근이 포함된 것은 물론이다.

 

연산군을 폐하려는 움직임의 중심세력은 전 이조참판 성희안과 지중추부사(2) 박원종이었다. 진성대군(훗날 중종, 정현왕후 윤씨의 아들이자 연산군의 이복동생)의 허락을 받은 성희안의 세력들은 신수근, 임사홍의 제거하는데 성공하였고, 연산군을 폐하고 진성대군을 왕위에 추대하니 이를 중종반정이라고 한다. 이때가 1506 9 2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