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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광해군, 난세의 영웅 그러나 권력투쟁에 무너진 비운의 왕

 

광해군, 난세의 영웅 그러나 권력투쟁에 무너진 비운의 왕

조선 제15대 임금 광해군(1575~1641)은 선조와 후궁인 공빈 김씨 사이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광해군의 이름은 혼이다. 광해군의 생모인 공빈 김씨는 임해군과 광해군을 두고 일찍 세상을 떠나 두 형제는 선조의 첫 번째 왕비인 의인왕후의 보살핌을 받고 자랐다.

▲ 선조의 가계도(군 외 11명의 공주와 옹주를 두었다)

 

선조의 적자도 아니며 장자도 아니었던 광해군은 총명함에 비해 아버지 선조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조정에서는 일찍부터 세자를 세우는 일이 논의되었으나, 선조는 의인왕후에게서 적자가 없는 상황에서 세자를 세우는 자체를 꺼려했다. 그러나 뜻밖의 상황이 광해군을 세자로 만들었다.

조선 최대의 외침인 임진왜란은 선조의 결심을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도성을 버리고 피란을 가는 꼴불견을 보였고, 들끓는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더 이상 세자 책봉을 미룰 수 없게 되었다. 끝까지 망설이던 줏대없는 임금 선조는 결국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다. 큰아들 임해군은 성질이 포악해 세자가 될 자질이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세자에 책봉된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분조(*)를 이끌며 종묘와 사직을 지켰다. 성난 민심을 수습하고, 민.관군과 의병 활동을 독려하며 온 몸으로 조선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선조가 해야 할 일을 아들인 광해군이 대신한 것이다. 광해군은 분조를 이끈 기간은 1592년(선조 25) 6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였다. 선조대신 실질적인 왕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 분조 :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에 의하여 임시로 두었던 조정(朝廷))

 

광해군을 괴롭힌 정통성 논란

전쟁이 끝나자 조정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당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이미 세자로 책봉되었고 위기의 조선을 위해 분조를 이끈 광해군이 건재한데 새삼스럽게 왕위 계승 문제가 불거진 이유는 명나라에서 광해군을 세자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은 세자 책봉과 왕위 계승에 대해서 명나라의 재가를 받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명나라는 광해군이 적자도 아니고 장자도 아니라는 이유로 세자 책봉의 재가를 미루고 있었다.

이에 조선 최대의 무능력한 임금이며 오로지 한 일이라곤 자식 생산만 돋보였던 무능한 선조는 얼른 마음을 바꾼다. 전쟁 중에 성난 민심을 피하려고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며 나라의 근본을 세우겠다고 공표했던 교지의 먹물이 마르지도 않은 상태인데 말이다. 선조의 이런 태도 변화에 광해군은 몹시 당황했다.

설상가상으로 첫 번째 왕비인 의인왕후가 죽자 50세(선조 35)인 선조는 김제남의 딸을 두 번째 왕비로 들이는데 인목왕후이다. 이때 인목왕후의 나이가 18세였으니 선조의 적통에 대한 미련은 대단했다. 그러한 선조의 열망이 통해서일까 1606년(선조 39)에 첫 번째 적자인 영창대군이 태어났다. 영창대군의 등장은 광해군에게는 또 다른 시련의 시작이다.

선조는 아예 노골적으로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했으면서 세자 행세를 하느냐"라며 광해군의 문안조차 받지 않았다. 그러나 1608년(선조 41) 선조는 갑자기 병이 깊어지면서 상황은 광해군에게 유리하게 급반전되었다. 죽음을 앞둔 선조는 광해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세상을 떠난다. 아무래도 두 살밖에 안되는 영창대군에게 보위를 물려줄 수는 없었던 것이다.

 

1608년(선조 41) 2월 1일 선조가 세상을 뜨자 광해군은 조선의 15대 왕으로 즉위하게 된다.

 

왕권을 위해 패륜을 저지른 광해군

광해군은 즉위하자마자 선조의 죽음과 자신의 즉위 사실을 명나라에 통보했다. 그러나 세자 책봉을 차일피일 미루던 명나라는 광해군 즉위에도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당시의 중국의 정세를 보면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국력이 쇠퇴해 멸망의 길을 가고 있으며,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가 청나라를 세우고 세력을 넓혀가고 있던 시기였다.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광해군의 즉위를 이용해 조선을 조정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광해군은 1609년(광해군 1) 3월에야 겨우 명나라로부터 책봉 조서를 받았다. 그리고 그해 5월 임해군은 유배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임해군을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만 이 일로 광해군은 왕권을 지키기 위해 혈육의 죽음을 방조한 패륜 군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권력을 잡은 대북 일파는 영창대군을 제거하기 위한 계략을 꾸미기 시작했다. 광해군이 어렵게 명나라의 승인을 받았다고 하나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이 살아 있는 한 정통성 논란은 계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광해군 5년에 일어난 칠서의 옥은 영창대군 세력을 제거하는 계기가 되었다.

칠서의 옥이란 서인의 거두인 박순의 서자 박응서를 비롯해 서양갑, 심우영 등 7명의 서자들이 모반을 도모한 죄목으로 옥고를 치룬 사건을 말한다. 이 일로 대북 세력은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를 몰아내는 데 성공하였지만 훗날 서인들이 반정을 일으키는 명분이 되었다. 이처럼 광해군은 왕권에 대한 집착으로 대북 세력의 전횡을 묵과했으니 스스로 반정의 불씨를 키운 것이다.

 

패륜에 가려진 광해군, 권력 투쟁의 희생양

광해군은 즉위 이전에 풍전등화의 조선을 구하기 위해 분조를 이끌며 왕재의 면목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왕위에 올라서도 조선을 재건하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임금이다.

광해군의 재위 기간 중 가장 눈에 띄는 성과는 외교 정책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실리주의적 등거리 외교를 펼쳤다. 조선시대의 외교 정책인 사대교린에서 벗어난  실용적인 외교 정책을 보여 주었다. 당시 명나라와의 의리를 중시했던 대부분 대신들과는 달리 광해군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선택한 것이다.

 

그러나 대북과 서인의 당쟁은 광해군을 왕위에 더 이상 머루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623년(광해군 15) 3월, 이서, 이귀, 김류 등을 주축으로 한 서인 반정군이 창덕궁에 들이 닥쳤고, 전혀 반정의 눈치채지 못했던 광해군은 문성군부인 유씨 그리고 폐세자 부부와 함께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서인이 일으킨 인조반정이 성공한 것이다.

광해군은 19년의 유배 생활 끝에 1641년(인조 19) 67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광해군의 묘는 경기 남양주시 진건읍 송능리 산 59에 있다.

 

그러면 파란만장한 생을 살다간 광해군이 폐출된 진짜 이유는 무엇일까? 

가장 본질적인 이유는 대북 세력의 독주에 대한 서인의 반발이었고, 여기에 왕권을 지키려는 욕심에 대북파의 전횡을 묵과한 광해군의 패착이 한 수 더해진 결과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