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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효종, 이루지 못한 북벌의 꿈 -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효종, 이루지 못한 북벌의 꿈 -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봉림대군의 친형은 북학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간 비운의 왕세자 소현세자이다. 조선 17대 임금에 오른 봉림대군은 인조와 인렬왕후 사이의 둘째 아들로 1619년(광해군 11)에 태어났다. 

1636년(인조 14)에 발발한 병자호란 때 봉림대군은 아우인 인평대군과 강화도로 피란을 갔다. 그러나 강화도마저 함락되면서 청나라 군의 인질이 되어 삼전도로 압송되었으며, 그곳에서 봉림대군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경험을 하게된다. 부왕인 인조가 청 태종 앞에서 삼궤구고두(*)하는 치욕스러운 장면을 생생히 지켜보았다. 그 후 봉림대군은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 심양에서 8년 간 인질 생활을 한다.

 

 

(* 삼궤구고두 : 삼배구고라고도 하며, 궤는 무릎을 꿇는 것이고, 고는 머리를 땅에 닿게 한다는 뜻으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3번, 이것을 한 단위로 3번 되풀이하는 중국 청(淸)나라 때 시행한 황제에 대한 경례법)

 

왕위에 오른 반청주의자 봉림대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형제는 심양에서 너무나 다른 행보를 보였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고관들과 교류하고 그들의 개화된 문명을 받아들이는 데 적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와 화친하는 것이 조선의 평화를 지키고 국익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봉림대군은 철저한 반청주의자의 태도를 보였다.  삼전도의 굴욕을 기억하는 봉림대군은 인질로 잡혀 온 자신의 처지와 노예로 끌려와 고생하는 조선 백성들의 참상을 생각하며 청나라에 대한 복수를 다짐했던 것이다. 어쩌면 두 형제의 이러한 대조적인 행동이 훗날 그 들의 운명을 가른 계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1645년(인조 23), 먼저 귀국한 소현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봉림대군은 새로운 세자로 결정되었으며, 급히 귀국하여 세자 책봉을 받았다. 소현세자가 죽은 지 40일 만에 논의가 시작된 세자 책봉은 단 하루만에 봉림대군으로 결정되었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의문 만큼이나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을 과정을 보면 소현세자의 죽음이 인조와 관련된 의문이 끊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여튼 그로부터 5년 후, 1649년(인조 27) 5월에 인조가 죽자 조선의 17대 왕인 효종이 되었다. 봉림대군이 세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소현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때문이지만 당시 종법(*)상의 문제로 세자 책봉에 말이 많았다.

(* 종법 : 조선의 친족제도의 기본 법으로, 적장자손을 대종이라 하여, 왕위 계승에서도 마찬가지로 적장자 우선하며, 소현세자에게는 3명의 아들이 있었으며, 소현세자의 처와 세 아들을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효종의 북벌 계획과 러시아 정벌

인조 때부터 큰 세력을 형성한 '호서사림'은 효종의 즉위와 함께 중앙 정계에서 더욱 막강한 세력으로 대두되었다. 그 중심에는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이 있었다. 호서는 지금의 충청도를 이르는 말이다.

인조반정을 성공시켜 정권을 잡은 서인들은 공서와 청서로 양분되었고, 효종 때에 와서는 낙당과 원당, 한당과 산당으로 갈라져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다. 그러나 1658년(효종 8) 효종의 북벌 계획이 구체화되는 시기 쯤에 정국의 주도권은 송시열이 중심인 산당이 권력의 중심으로 자리 잡았다. 

 

▲ 효종이 쓴 한글편지

 

그 동안 당파 싸움에서 한발 밀려나 낙향하고 있던 송시열은 대의명분론에 입각한 반청론을 펼치며 효종의 북벌 파트너로서 중앙 정치에 화려하게 복귀한 것이다. 이후 송시열은 조선 후기에 가장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인물로 자리 매김하게 된다.

1652년(효종 3)부터 효종은 북벌을 위한 본격적인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군사력을 위해 어영군을 확대 개편했다. 1천 명의 상주 병력이 도성과 국왕을 호위하며, 왕의 친위병인 금군 일천 명을 기병화해 전투력을 향상시켰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벌의 기회는 좀처럼 찾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청나라의 요청으로 러시아 정벌에 나서는 처지가 되었다. 당시 청나라는 흑룡강 유역에서 러시아와 군사적으로 충돌하고 있었다. 그런데 청나라의 구식 무기로는 러시아의 총포에 대적할 수 없었기에 조선의 조총군 파병을 요청한 것이다.

그리고 조선은 두 차례의 러시아 정벌에서 기대 이상의 전과를 거두게 된다. 이는 그 동안 북벌을 계획하며 군사력을 강화시킨 효종의 노력이 실전에도 통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정벌은 정작 복수의 대상인 청나라를 도와준 결과가 되었기에 북벌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커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루지 못한 북벌의 꿈

효종의 북벌 계획에 회의를 갖는 사람이 늘어나자 효종의 북벌 계획은 힘을 잃어 갔으며, 설상가상으로 북벌론의 한 축이었던 송시열과의 견해 차이는 효종을 더욱 힘들게 했다. 송시열은 처음부터 북벌론에 영합하여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가 목적이었기에 효종과는 북벌에 대한 접근 부터가 달랐다. 군사력을 강화해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북벌을 구상했던 효종과 달리 송시열의 북벌론은 추상적인 관념에 불과했다.

한 마디로 두 사람의 북벌론은 처음부터 동상이몽이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1659년(효종 10) 효종은 송시열과 독대하는 자리에서 자신의 북벌 계획을 구체적으로 밝혔다.

저 오랑캐들은 이미 망할 형세에 있다. 10년을 기한으로 군사 훈련과 군 장비, 군량을 비축해 조신과 국민들이 일치단결하고, 군사 10만 명을 양성해 틈을 타서 명과 내통해 기습하고자 한다. <자대전 악대설화 중에서> 

그러나 효종의 이러한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송시열은 여전히 북벌을 위해서는 내수가 중요하다는 기존의 주장을 고수하였다. 이에 효종은 "지금은 너나없이 눈앞의 이익만을 꾀하고 있으니, 나와 함께 일 할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는가."라며 이루지 못한 꿈을 탄식하였다.

송시열과 독대 후 두 달만에 효종은 급사하고 말았다. 1659년(효종 10) 5월 4일, 효종은 얼굴에 난 종기를 치료하던 중 의원이 침을 잘못 놓아 엄청난 피를 쏟고 숨을 거두었다. 유언 한 마디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효종, 그와 함께 북벌 계획도 그렇게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 때가 효종의 나이 41세였다.

 

 

조선은 왕의 의지만으로 이끌어 가는 나라가 아니다. 신하와의 불협화음으로 북벌 계획은 효종의 허망한 꿈으로 끝나게 되었다. 효종의 능은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에 위치한 영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