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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서양철학의 3인방 -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서양철학의 3인방 -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고대 그리스 철학 계보에 소피스트 학파가 있다. 기원전 5세기 중엽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이전 철학자들의 주된 관심이었던 자연의 본질에 대한 관찰보다는 인간 자체에 관심을 갖고 인간 자신과 관련된 문제들을 고뇌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 철학자들을 소피스트 학파라 부른다. 소피스트란 '지혜로운 자' '현명한 자'라는 의미이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언으로 대변되는 소피스트 학파는 철학의 중심 영역을 신과 자연에서 인간으로 돌려 처음으로 인간과 사회에 관한 문제에 관심을 보였다는 점에서 평가 받을만 하다. 그러나 서양철학을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소피스트 학파의 상대적이고 개인주의적 성향에 대항하여 절대적 진리를 탐구하였던 철학자이다.

흔히 서양철학 사상의 3인방이라 불리는 3명의 철학자들은 바로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며 독배를 마신 소크라테스부터 시작하여 그의 제자인 플라톤 그리고 플라톤의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말한다. 따라서 요즘 대세인 인문학의 한 축인 철학 분야에서 중요한 양대 산맥을 차지하고 있는 고대 서양철학자 3인방에 대하여 알아보는 것도 의미있겠다.   

 

'너 자신을 알라'라고 외쳤던 소크라테스

기원전 469년에 태어난 소크라테스는 순탄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소크라테스가 어느 정도의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려지고 있지 않지만, 다양한 철학 사상에 정통하고 웅변술과 대화법에 능통한 청년이었다는 점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외모는 당시 희극의 주인공으로 삼을 정도로 다소 기이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소크라테스는 당대 소피스트들의 궤변과 금욕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철학의 의미를 들여다 보면 알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철학이란 자신의 수양만이 아니라  아테네 시민들 모두의 심성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느 데 쓰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그 일이야말로 신이 자신에게 부여한 사명이라고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제자 플라톤과 달리 자신의 사상을 책으로 남기지 않았다. 단지 그의 사상은 제자인 플라톤의 『대화』와 크세노폰의 『회고록』을 통해 전해지는 것이 전부이다. 소크라테스의 철학 사상은 보편적 진리, 절대미, 절대선의 개념을 인정한다. 그는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분석, 비교, 변증, 종합 등의 방법론을 제시했는데 소크라테스의 유명한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 있는 문장이다.

소크라테스의 언변은 '산파술'이라는 대화법으로 유명하다. 대화를 통해 상대의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막연하고 정확하지 않은 지식을 확실한 개념으로 바꿔주는 것이다. 즉,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대화자에게 개념의 실체를 깨닫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에게 수많은 제자들이 모여든 것은 당연하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플라톤과 알키비아데스, 크세노폰, 디오게네스 등이다.

 

 

그러나 이러한 유명세는 소크라테스에게 죽음을 불러오는 원인이 되었다. 항소법원에서 사형을 받은 소크라테스는 <변론>에서 법정이 철학을 포기한다면 석방해주겠다는 제안을 하더라도 '자신이 철학을 하는 이유는 신의 명령'이기 때문에 그러한 결정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하며 독배를 마셨다.

 

이데아론의 플라톤

명문가의 자제였던 플라톤을 철학의 바다로 이끈 이는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였다. 한때는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로 아테네 올림픽에 참여했던 젊은 귀족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를 만나 친구로 혹은 스승으로 모시며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이어받고 새로운 철학 세계를 열어 나갔다.

 

 

플라톤은 스무 살 때부터 소크라테스의 문하생으로 공부했는데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하자 아테네를 떠나 몇 년간 여러나라를 떠돌며 망명생활을 하였다. 시실리아 섬을 방문한 플라톤은 시라쿠사의 왕인 디오니시오스의 초빙을 받아 그곳에서 자신의 철학적 이념을 펼치려 했으나 실패하고, 기원전 388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왔다.

아테네로 돌아온 플라톤은 '아카데메이아'라는 교육기관을 건립했다. 아카데메이아는 기숙사, 강의실, 박물관 등을 갖춘 일종의 종합대학이었다. 플라톤은 이곳에서 약 20년 동안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 냈는데, 아카데메이아의 전통은 동로마 제국의 유스티니아누스가 이 곳을 폐지할 때까지 약 900년 동안 계속되었다.

아카데메이아는 좁은 의미의 철학뿐 아니라 수학이나 수사학과 같은 다양한 분야의 걸쳐 광법위한 학문 탐구가 이뤄졌다. 원뿔곡선론에 관한 연구와 같은 기원전 4세기의 중요한 수학적 작업은 모두 아카데메이아에서 이뤄낸 업적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초기 저술들처럼 수학 외의 분야에서도 활발한 연구가 이뤄졌다.

 

 

플라톤의 사상은 이데아론이라는 학설로 대변된다. 이는 "우주의 모든 현상 뒤에는 불변의 진리가 있으며 이것은 이데아라는 영원한 형상 속에서 발견되는 것이다"라는 주장이다. 플라톤은 우리가 눈으로 보는 현상은 이데아 세계의 반영에 불과한 것으로 절대적인 정의, 미, 진리는 이데아 세계에서만 존재한다고 말했다.

플라톤은 철학, 과학, 정치학 등 다방면의 저술활동을 했으며, 그의 정치 사상은 그의 저서에 잘 나타나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소크라테스의 변명』『프로타고라스』『국가론』『법률론』『정치가론』 등이 있다.  

 

청출어람 청어람의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의 아카데메이아가 배출한 최고의 수재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마케도니아 스티기라 출신으로 플라톤의 제자이다. 플라톤의 제자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 모든 학문에 능통했던 백과사전적인 인물, 리케이온이라는 학교를 열어 젊은이들의 교육에 앞장섰으며 거의 모든 학문의 기초를 닦은 학자 등은 그를 설명하는 표현들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수학, 물리학, 천문학, 생물학, 생리학, 해부학, 식물학, 박물학, 심리학, 정치학, 논리학, 시학, 수사학, 미학, 신학, 형이상학 등에 정통했다고 한다. 어찌 한 인간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인지 믿어지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귀족 가문 출신으로 열여덟 살에 플라톤의 아케데메이아에 입학하였으며 그곳에서 20여 년간 학문을 닦았다. 기원전 347년 플라톤이 죽은 후에는 친구 헤르미아스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식물학과 동물학을 연구했다. 그리고 헤르미아스가 죽은 후 고향인 마케도니아의 왕 필리포스 2세의 요청으로 기원전 343년부터 알렉산드로스 왕자의 스승으로 일하게 되었다.

기원전 335년에 아테네로 돌아온 아리스토텔레스는 리케이온이라는 학교를 건립하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그는 오전에는 고급반을 강의하고 오후에는 일반 학생들을 대상으로 웅변이나 수사학 같은 일반적인 강의를 진행했는데 이때 산책을 하며 수업을 진행해 아리스토텔레스 학파를 소요학파라고 부르기도 했다.

기원전 323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가 죽자 반마케도니아파가 대두되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한때 알렉산드로스의 스승이었다는 사실로 '불경죄'에 기소되었다. 그 옛날 무고한 죄목으로 죽음을 맞은 소크라테스를 상기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시는 철학을 더럽히지 못하게 하기위해 아테네를 떠난다"라는 메세지를 아테네 시민에게 남기고 미련없이 아테네를 떠났다. 그리고 기원전 322년 아리스토텔레스는 에우보이아에서 제자인 안티파테르를 후계자로 삼고 아내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수제자였지만 사상적으로는 스승과 노선을 달리했다. 그는 실재란 보편적인 이데아에 있지 않고 개별적이며 구체적인 것에 있다고 주장했다. 즉, 형상(플라톤의 이데아)과 실제는 모두 중요하며 둘 다 영원한 것으로 이 둘이 결합함으로써 비로서 우주의 본질적인 성격이 부여된다는 일원론적인 사상을 주장했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덕목을 강조했으며 중용이야 말로 인간의 자기실현을 위한 길이라 강조하였다.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가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위대한 철학자였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모든 지식 분야에 걸쳐 개척을 이룬 선구자였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