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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구중궁궐 속 여인들 - 왕비와 후궁들의 내명부

 

구중궁궐 속 여인들 - 왕비와 후궁들의 내명부

조선시대의 임금들은 왕비외에도 많은 후궁을 거느렸다.

임금의 다산은 나라의 강건함과 풍요로움의 상징이 되고 왕권을 강화시키는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궐내의 후궁들과 궁녀들은 출신에 따라 계급이 주어지고 서열이 매겨졌는데 이들을 총 책임자는 왕비였다.

 

구중궁궐의 여인들

후궁은 양반가문의 딸이 정식으로 간택되기도 하지만  궐내의 궁녀중 임금의 눈에 띄어 신분의 급상승이 이루어지기도 한다. 모든 궁녀들의 최대 목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궐내의 모든 여자들, 왕비를 포함해서 모든 여자들은 임금의 총애를 받고자 노력(?)하고 그 자리를 지키고자 또는 더 높은 자리에 올라 권세를 누리고자 암투를 벌이는 곳이 구중궁궐이다.

 

▲ 창경궁 경춘전

 

궐내의 여자들의 조직인 내명부는 성종때 명시된 것인데 서열에 따라 계급이 주어지고 왕비의 관리감독을 받게 되는데 왕비는 품계가 없다. 무급의 최정상, 상전이다.

후궁들은 정1품 빈과, 종1품 귀인, 정2품 소의, 종2품 숙의, 정3품 소용, 종 3품 숙용, 정4품 소원, 종4품 숙원이 있으며 정5품 상궁부터 종9품 주변궁까지는 궁관이라 하여 왕과 왕비를 모시는 일외에 궁궐내의 잡역 궁인을 부렸다.

 

내명부의 역사 

삼국시대나 고려 시대때는 후궁이 없었고 혼인하는 부인들에게 모두 황후나 부인의 호칭을 두었다. 계급이나 서열이 따로 있지 않았고 혼인한 순서대로 자연스럽게 순서를 정했다.

당시에는 족내혼이라해서 같은 친인척끼리 혹은 귀족이나 왕족 가운데서 딸을 뽑아 임금의 부인으로 보내는 경우 지체가 높은 집안들끼리의 혼인이라 서열이 없었고 후궁의 개념도 없었다.

하지만 조선시대때 유교가 들어오면서 중국의 영향을 받아 족내혼을 금지하고 정비와 후궁의 차별을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직 한 여인 장희빈만은 잠시지만 왕비의 자리까지 올라갔었다.

 

▲ 창경궁 취선당, 장희빈이 지내던 곳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여성인 장희빈!

그녀는 미관 말직 장희재의 여동생으로 입궐했지만 뛰어난 미모로 숙종의 눈에 띄어 신분이 급상승하였다. 게다가 아무도 낳지 못한 왕자까지 생산하자 그녀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듯했다. 그녀는 내친김에 왕비의 자리까지 오르는 활약상을 보였다.

하지만 사필귀정이라 그녀가 왕비의 자리에까지 오르기위해 저지른 악행이 들통나면서 왕비 자리에서 내려오고 사약을 마시고 처절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그녀로 인해 이후 후궁은 절대 정비의 자리에는 오르지 못한다는 새로운 법이 생겨나게 된다.

 

▲ 창경궁 통명전 내부,왕비의 침전으로 희빈 장씨와 인현왕후의 이야기가 전해지는 장소이기도 하다

 

한번 들어가면 죽어서나 나가게 된다는 궁궐 속 여인네들, 자신이 부린 욕심과 권력 쟁탈전의 희생양이 되어 꽃같은 많은 인생들이 피지도 못하고 스러져간 한 서린 곳이 궁궐인데 아이러니하게도 여인네들의 로망이 되는 곳이 궁궐이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