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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흥진비래,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하더니 억울하게 요절한 남이 장군

 

흥진비래, 젊은 나이에 승승장구하더니 억울하게 요절한 남이 장군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에게 먹여 없애리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훗날 누가 대장부라 이르리오.

 

거칠것 없던 기백의 남이 장군

조선시대 무신 남이 장군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백두산에 세운 평정비에 새긴 시이다. 27살의 젊은 나이에 나라를 위해 큰 공을 세우고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얼마나 뿌듯했을지는 시에서도 묻어난다. 하지만 이제 화려한 미래가 다가오는 줄만 알았던 그에게 이 시는 죽음을 가져다 주었다.

무술연마를 마치고 집으로 가던 어린 남이는 계집종 아이의 머리 위에 앉은 귀신을 보고 그 계집종을 따라갔다. 그 계집종이 들어간 곳은 권람의 집이었는데 그 때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권람의 딸이 죽었다는 것이다. 어린 남이는 그것이 귀신의 소행인 것을 눈치 채고 그 집으로 들어가 귀신을 내쫓고 딸을 살려냈다.

이것을 인연으로 어린 남이는 권람의 사위가 되었다. 그리고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와 세조의 신임까지 얻어 26살의 나이에 병조판서에 오르는등 승승장구하였다.

 

하지만 호사다마라 했던가 부인과 어머니, 즉 고부간의 갈등이 무척 심해서 부인과 이혼을 하려고 세조에게 상소를 올렸다고 한다. 얼마나 갈등이 심했으면 이혼까지 할 정도였을까 궁금하지만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고 이혼을 허락했다는 기록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흥진비래 호사다마

남이 장군을 유독 아꼈던 세조가 죽고 예종이 즉위하자  이를 시기하던 무리들이 남이 장군을 역모를 꾸몄다고 모함을 했다. 증거로 평정비에 새긴 시를 내 놓았는데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이라는 부분의 시를

'사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으로 고쳐서 역모로 몰아 부친 사람은 유자광이었다.

이미 사태가 기울었음을 짐작한 남이 장군은 모진 고문에 허위로 자백을 했고 역모를 꾸민 죄로 처형을 당했다. 특히 그의 어머니는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수레에 묶여 사지가 찢기는 극형을 당했는데 이는 상당히 이레적인 처벌이었다고 한다.

 

 

아마도 권람의 집안 사람들이 이혼을 당한 딸의 복수를 한 것이 아닌가하는 추측도 해본다.  남이 장군을 처형한 예종은 1년여 후에 요절하고 말았다. 이미 귀신과 통하고 있던 그가 예종에게 복수를 한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었다고 한다.

 

남이 장군은 왜 요절했을까?

채 서른도 못 채우고 죽은 남이 장군, 안타까운 마음도 들지만 궁금증도 많다.

부인과 어머니의 관계가 왜 그처럼 심각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는지 또 아무리 악처라해도 임금에게 공식적으로 이혼을 요청할만큼 부인의 잘못이 그리 컸던 것인지, 게다가 무술을 최고 경지에 오를 만큼 정신력도 강하고 북쪽 변방의 난을 평정할 만큼 체력도 강인한 사람이 고문을 못이겨 허위 자백을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는다.

그가 남긴 시에서 보였던 장군의 기개는 어디로 갔는지...

괜한 마음에 추측건대 혹여, 우선은 너무 젊은 나이에 거칠것 없다보니 앞뒤 돌아보지 못한 면이 있었던것 같다. 그리고 남이 장군 자신이 고부갈등에 불을 붙인 것은 아닌지, 임금의 총애를 받아 자만심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말이다.

세조가 조금 더 살아있었다면 정치 경험도 더 쌓고 인생살이도 좀 더 배워서  좋은 재목이 되었을텐데 시기를 잘못타고 나서 자신이 가진 능력을 제대로 펼쳐 보지도 못하고 요절하고 말았으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무당들 중에 남이 장군을 신으로 모시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장군의 용맹스런 기개가 액운과 병마를 물리친다는 상징성때문이다. 그리고 무속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이들의 영혼에 신통력이 있다고 믿었는데 장수가 억울하게 죽었으니 그 영혼의 신통력이 얼마나 굉장하겠는가.

하지만 한편 생각하니 남이 장군의 나이가 내 아이와 비슷한 20대이다. 얼마나 그 죽음이 원통하고 절통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시리도록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