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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잊혀지지 않는 세계의 10대 사건(上)

최근에 '세계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이라는 책을 읽었다. 책의 내용은 인류의 조상이라는 호모 사피엔스의 출현부터 2001년에 발생한 9.11테러까지 세계사에 영향을 미친 100가지 굵직한 사건들을 담고 있다.

그 중에는 익히 잘 알고 있는 사건, 어렴풋이 알고 있는 사건들도 설명되어 있으며, 책을 통하여 처음 접하는 사건들도 꽤 있었다.

이 글은 100가지 사건 중에서 흥미롭다고 생각되는 10가지 사건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한다. 10가지 선정 중에서 1500년 이후의 사건은 세계 경제에 영향을 미친 사건을 중심으로 골라 보았다.

세계사에 능통하신 분은 이미 잘 아는 내용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세계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에는 우리나라와 관련된 사건은 없어 아쉬웠으나, 저자에 맘이니 어쩔 수 없겠다.


   인류의 탄생에서 고대 오리엔트까지

1. 25만 년 전 :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
 
현생 인류의 탄생

☞ 약 620만 년 전 : 침팬지와 인간이 분리되었다.
☞ 약 600만 년 전 :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에서 인류의 첫 조상으로 추정되는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가 출현했다.
☞ 약 390만 년 전 : 직립 보행을 하는 인간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가 출현했다.

지구 상에 '인류'라고 이름 붙일 존재가 등장한 것은 15만년에서 25만년 전쯤이다.
구인류와 현생인류를 구분하는 존재인 호모 사피엔스는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에 대해서는 크게 두가지 의견이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태동하여 전 세계로 이주했다는 아프리카 기원설과 여러 대륙에서 동시에 진화했다는 다지역 기원설이다.

단 학자들은 최근 초기 호모 사피엔스의 화석이 아프리카 지역에서만 발견된다는 데 착안하여 아프리카 기원설에 점차 무게를 두고 있다.


<최초의 인간 루시> 1974년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 동북쪽 아와시 강 하류에서 한 무더기의 뼈가 발견되었다. 학자들은 이 화석을 약 320만년 전에 살았던 한 여성의 유골로 추정했다. 발견 당시로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화석 인류였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에 속하는 이 여성 유골에게는 '루시'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발굴단은 직립 보행을 했던 이 여성이 '인류의 어머니'라고 믿었다.

그런데 수습된 루시의 뼈가 인간 골격의 28%에 지나지 않아 정말 인간이었는지, 여성이었는지에 대해 판단하기 힘들다는 주장도 제기됐다.(발굴단이 루시를 여성으로 믿었던 것은 키가 작기 때문이다)

1992년 루시가 발견된 지역 인근에서 '아르디'가 발굴되면서 루시는 '인류의 어머니' 자리를 내주었다.
아르디는 약 440만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직립 보행을 했고, 물건을 세게 쥘 수도 있었다고 한다. 학명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라미두스다.  


2. 기원전 1750년 경 : 함무라비 법전

역사상 가장 오래된 성문법

☞ 기원전 1600년경 : 중국 상나라가 건국되었다.
☞ 기원전 1600년경 : 그리스가 에게해 문명의 중심지로 떠오르고, 미케네에서 선형문자 B가
                              사용되었다.
☞ 기원전 1550년경 : 아리아 인이 인도 북부에 정착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당한 만큼 갚아 준다는 보복법의 구절은 기원전 1750년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함무라비 법전은 메소포타미아에서 도시 문명을 꽃피웠던 바빌론 왕조의 함무라비 왕이 만든 법전이다.

함무라비는 바빌론 제1왕조의 여섯 번째 왕이다. 그는 기원전 2350년경 아카드의 사르곤 왕이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한 후 약 500년 만에 분열된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두 번째로 통일한 정복 왕이다.

그는 제국을 통일한 후에도 무력을 사용할 줄만 알았던 여타의 고대 왕들과는 달리 정서적, 제도적으로 통일 국가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이런 시도의 결정체가 바로 함무라비 법전이다.

이처럼 법전의 목전은 관습법을 바탕으로 범죄여부를 판가름하고 형벌의 기준을 제시하는 이념을 정리하여 중앙에 의한 제국 통치의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함무라비 법전은 총282조로 높이 2.25미터의 돌 기둥에 설형문자로 새겨져 있다. 법전의 대표적인 구절을 아래에 첨부했다.
1조, 살인죄로 타인을 고발한 사람이 죄를 확증하지 못하면 그 고발자를 죽인다.
108조, 술집 여주인이 술값으로 곡물을 받지 않거나 지나친 정도의 은을 요구하거니 술의 되를 곡물의
         되보다 작게 했을 때는 그녀를 강물에 던진다.
128조, 아내를 얻고서 그녀와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으면 그녀는 아내가 아니다.
143조, 만약 아내가 몸을 지키지 못하고 밖에 나가 가산을 낭비하고 남편을 멸시했다면 그녀를 강물에
         던진다.
195조, 아들이 그의 아버지를 때렸을 때는 그 손을 자른다.
196조, 자유인의 눈을 뺀자는 그 눈을 뺀다.
215조, 의사가 수술칼로 중대한 상처를 만들어 사람을 죽게 했거나 수술칼로 각막을 절개해 눈을 못
         쓰게 했으면 그 의사의 손을 자른다.

함무라비 법은 고대의 원시적 잔재가 다소 남아 있다고 해도 종교적 색채가 옅어지고 현대적인 의미의 '법'의 모습을 한, 한 단계 발전한 법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고전 문명의 시대

3. B.C 469년 경 : 소크라테스의 탄생

고대 그리스 철학의 부흥

☞ 기원전 469년경 : 소크라테스가 태어나고 서양 사상의 근간이 그의 시대에 확립되었다.
☞ 기원전 387년경 : 플라톤이 철학과 과학, 교육, 연구를 위한 기관으로 아카데메이아를 창설했다.
☞ 서기 529년 : 유스티니아우스 1세가 아카데메이아를 폐쇄함으로써 고대 그리스 철학의 시대가
                      막을 내렸다.

거리의 사람들과 문답식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신과 세계의 근거를 스스로 이끌어 내고자 했던 소크라테스, 감각 세계를 넘어선 완전한 진리를 추구한 플라톤,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응하여 현실적, 경험적 진리를 추구한 아리스토텔레스.

 


소크라테스가 출현하기 이전 그리스 철학은 자연철학으로 대표된다. 자연현상에 대한 의문을 신화가 아니라 자연에 기반한 사유로 풀어 내기 시작한 것이다. 만물의 근원이 물이나 공기 혹은 불이라는 등의 설명은 오늘 날에 보면 다소 신화적으로 보이지만, 관찰을 바탕으로 한 인식론적 사유룰 했다는 데 큰 의미가 있겠다.

소크라테스 시대로 일컬어지는 두 번째 단계는 흔히 아테네 철학이라 불리웠다.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469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당대의 사람들 대부분이 믿고 따르던 관습적인 사고에 도전하여 서양 철학사의 위대한 전환점을 마련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시장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진 문답법으로 유명하다. 따라서 그의 사상은 제자들이 남긴 글을 통해 유추할 뿐이다. 대개 플라톤이 쓴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을 소크라테스의 사상을 이해하는 지표로 삼는다.

이런 그에게 열광한 이도 많았지만 모든 관념에 대해, 선과 정의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하는 그는 '국가의 위험한 인물'로 낙인찍혀 고발당했다.

그리고 그가 생전에 '악법도 법이다'라고 말하고 독배를 마셨다는 설이 있지만, 학자들은 이를 과거 권위주의 정권에서 억압적인 법 집행을 정당화하는 데 악용된 것일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결국 이 내용은 2004년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따라 일부 중학교 교과서에서 삭제되었다.    


4. 79년 : 베수비오 화산 폭발

폼페이 최후의 날

☞ 기원전 60년 : 폼페이우스가 지중해의 해적을 소탕하고 로마 세계의 영웅이 되었다.
☞ 14년 : 로마 제국의 아우구스투스가 사망하고, 양자인 티베리우스가 로마의 통치자가 되었다.
☞ 80년 : 로마에 원형극장인 폴라비우스 콜로세움이 완공되었다.

79년 8월 4일 오후 1시,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 만 연안의 고대 도시 폼페이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사람들은 평소의 지진으로 생각하고 굳이 대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굉음의 진원지는 나폴리에서 동쪽으로 12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베수비오 화산이었다. 이 폭발은 18시간에 걸쳐 100억 톤에 가까운 화산재를 쏟아 내었다.

잿빛 화산재는 공포 그 자체였다. 2,000명의 주민들이 그대로 화산재에 묻혀 '화석'으로 남았다. 당시 비처럼 쏟아져 내린 화산재의 두께는 5~7미터였다고 전한다. '한 도시를 가장 완벽하게 보존하는 방법은 화산재로 뒤덮는 것'이라는 자조 섞인 표현이 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양이었다. 


1850년대 말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룬 다음에야 제대로 된 고고학자들이 투입되어 폼페이 최후의 날이 조금씩 밝혀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발굴된 폼페이는 전체의 절반 정도로 추정된다고 한다.
처음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인간화석'이었다. 순식간에 굳어 버린 사람들의 얼굴에는 2,000년이 지난 후에도 공포가 생생히 묻어 있었다.

화산재에 파묻힌 도시의 수로는 거의 완벽한 형태로 복원되었다. 학자들은 제정 로마의 문화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폼페이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폼페이 유적이 중요한 이유는 제정 로마의 하루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을만큼 다양한 사물이 한순간에 파묻혀 버렸다는 데 있다.

베수비오 화산은 이후에도 몇 번 더 분화했다. 17세기에도 1만 8,000명의 주민이 희생된 일이 있다. 1944년 분화 때에는 나폴리 시민들이 미리 피한 덕분에 큰 피해는 없었다. 가장 최근에는 1979년에 분화했다.

나머지 6개 사건은 다음 글에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잊혀지지 않는 세계의 10대 사건(中/下)
마르크폴로의 동방견문록(1299년), 구덴베르그의 성서간행(1450년), 네달란드의 동인도회사 설립(1602년), 아편전쟁(1846년), 검은 목요일(1929년), 석유파동(197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