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Repositorium/History

잊혀지지 않는 세계의 10대 사건(中)

이 글은  도서 '세계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에서 임의로 10개의 사건을 발췌하여 작성하였음을 다시 한번 언급하며, 나머지 사건을 계속해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2011/08/14 - [세상을 보는 창/Zoom-in@all] - 잊혀지지 않는 세계의 10대 사건(上)

1. 25만 년 전 : 호모 사피엔스의 등장
2. 기원전 1750년 경 : 함무라비 법전
3. B.C 469년 경 : 소크라테스의 탄생
4. 79년 : 베수비오 화산 폭발

이번 글에서 소개되는 글 중에는 사건 자체는 아니나, 사건 중에서 우리나라의 역사적 기록이 등장한다. 그러나 좋지 않은 사례로 등장하니 안따갑다. 어째튼 세계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 본다.


  중세시대에서 르네상스까지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11세기 무렵까지 유럽은 세계의 후진 지역에 불과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고대부터 기술과 문명이 발전한 중국과 이슬람은 모든 면에서 유럽을 앞서간 시기였다.

5. 1299년 :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중국을 여행한 배네치아의 상인

☞ 1274년 : 마르크 폴로가 원나라를 방문하고 쿠빌라이 칸의 궁정에서 벼슬을 하면서 중국 각지를
                여행했다.
☞ 1325년 : 이븐 바투타가 이집트와 시라아를 거쳐 이슬람의 메카로 성지 순례를 했다.
☞ 1375년 : 기존의 무역로를 그린 카탈루나 지도가 제작되었다.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이탈리아의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롬버스는 여행 내내 한 권의 책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었다.13세기 말 이탈리아의 상인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를 담은 '동방견문록'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정과 과장된 표현으로 인해 실제 여행기가 아닌 상상력의 소산으로 폄하되기도 한 이 책은 여전히 논쟁의 소지가 많이 있다.
그렇다 해도 그의 책은 중세 유럽인들에게 유럽 바깥 세계를 탐험할 수 있도록 영감을 준 점은 높이 평가할 만 하다.


마르코 폴로는 1254년 베네치아의 거상 니콜로 폴로의 아들로 태어났다.
1271년 17세가 되던 해 아버지 니콜로 폴로와 삼촌 마테오 폴로를 따라 여행길을 올랐다. 마르코 폴로가 동행한 여행의 목표는 최종적으로 쿠빌라이를 알현하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마르코 폴로 일행이 쿠빌라이의 여름 궁전에 있는 상도(오늘날의 네이멍 자치구의 남부 돌룬노르)에 도착한 것은 1274년, 집을 출발한지 3년 만의 일이었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를 알현했고, 쿠빌라이의 요청에 따라 관료 생활을 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베이징을 비롯한 원의 구석구석을 여행하며 여론과 세태를 파악해 쿠빌라이에게 직접 보고했다고 한다.
쿠빌라이의 총애를 받던 그는 원나라 공주 코카친이 타타르 국으로 시집가는 길을 수행하게 된 것을 계기로 1295년 베네치아로 돌아왔다. 고향을 떠난지 20년 만의 귀향이었다.

귀국 후 해군에 입대한 마르코 폴로는 동방 무역로를 두고 벌어진 베네치아와 제노바의 전쟁터에 파병되었다 전쟁포로로 잡혀 제노바 감옥에 투옥되었다.
감옥 안에는 피사 출신의 이야기 작가인 루스티켈로도 있었다.

루스티켈로는 글을 모르는 그를 대신해 이야기를 받아 적었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동방견문록'이었다.
책의 원제는 '세계의 서술'이라고 한다.

이 책은 당대에도 그 진위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많았다.
그러나 다소 과장과 거짓이 섞여 있고 마르코 폴로의 동방 여행의 사실여부를 떠나, 신비한 동방 세계에 대한 다양하고 풍부한 묘사는 중세 유럽 사람들의 호기심과 탐험 욕구를 충분히 자극하였다. 


6. 1450년 : 구텐베르그의 성서 간행

지식 공유의 첫걸음

☞ 1045년 : 중국에서 최초의 활자 인쇄술이 등장했다.
☞ 1276년 : 이탈리아 파브리아노에 유럽 최초의 종이 제작소가 설립되었다
☞ 1377년 : 고려에서 금속활자로 '불조직지심체요절'이 간행되었다. 

흔히 금속활자를 발명한 사람으로 독일의 구덴베르크를 꼽는다.
그 뒤에는 어김없이 1377년 고려에서 금속활자로 '불조직지심체요절'이 인쇄되었으니 그가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사람은 아니라는 주장이 이어진다. 그러나 구텐베르그는 금속활자의 발명자가 아니라 금속활자를 이용한 책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활판 인쇄술을 고안하고 보급한 사람이다.

그는 많은 활자를 주조할 수 있는 자모들이 각인된 주형, 제지와 제본에 사용되는 프레스를 이용해 만든 인쇄기, 인쇄용 유성잉크, 동판 인쇄 방식 등을 만들었고, 현대에도 사용되는 인쇄기의 전신을 고안해 낸 인물이다. 중국과 한국, 기존 유럽 지역에서도 활판 인쇄술이 사용되었으나 구텐베르그의 인쇄기는 기존의 인쇄 기술에서 찾아보기 힘든 혁신적인 것이었다.

이런 그의 인쇄술을 통해 다양한 사상과 지식들이 빠르게 유럽 전역으로 보급되었고, 이를 통해 다시 새로운 사상과 지식이 등장하면서 인류는 문화 대혁명을 겪게 되었다. 특히 활판 인쇄술을 통한 성서의 보급이 없었더라면 루터의 종교개혁 역시 빛을 발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1450년 마인츠로 돌아온 구텐베르그는 인쇄소를 차리고 '42행 성서'로 알려진 '구텐베르그 성서'를 찍어 냈다. 두 권 분량으로 전체가 1,272쪽이나 되는 방대한 책이었다. 그 전에는 필사본는 만드는 데 품이 많이 들어 값이 비쌋기 때문에 일반 신도들은 '성서'를 감히 소유할 엄두도 내지 못했던 점을 개선한 것이다.

성서가 널리 보급되면서 이제까지 사제들의 설교에만 의지했던 신도들이 직접 성서를 찾아보면서 나름대로 해석할 여지가 생겨났다. 1522년 마르틴 루터가 라틴어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보급한 것보다 성서를 대중화하려는 시도가 70여 년 전에 일어난 것이다.

이러한 구텐베르그의 업적은 '지식의 보급'이라는 의미로 가치있게 평가된다.
1971년 미국에서 시작된 '구텐베르그 프로젝트'는 인류의 고전을 전자문서로 변환해 인터넷을 통해 누구나 무료로 내려받을 수 있도록 하려는 가상도서 프로젝트이다.   


   유럽의 팽창과 근대 시민 사회의 형성

15세기 유럽은 과학과 철학, 예술 등 지식 혁명을 누렸다. 이런 지식 혁명은 과학기술 발전을 일으켰고, 이는 대항해 시대라고 불리는 탐험 활동으로 이어졌다. 세계로 눈을 돌린 유럽은 물리적, 지적으로 크게 팽창하였다.

7. 1602년 : 네달란드의 동인도회사 설립

세계 무역의 역사

☞ 1588년 : 에스파냐의 무적함대가 잉글랜드에 패배하며 유럽 무대의 주역이 바뀌었다.
☞ 1602년 : 네달란드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설립되었다.
☞ 1651년 : 잉글랜드의 크롬웰이 네달란드의 무역 성장을 저지하기 위해 '항해조례'를 발표했다.

16세기가 저물고 17세기가 시작되는 시기, 유럽의 최강대국은 단연 무역대국으로 발돋움한 네달란드였다. 에스파냐로부터 각 독립한 신생국, 인구 150만 명에 불과한 소국이 몰락한 에스파냐의 뒤를 이어 세계를 경영했던 것이다.

네달란드는 당시 전 세계 교역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전 세계의 자본이 몰려들면서 수도 암스테르담에 세계 최초의 증권거래소가 문을 열었다.
중국인, 유대인과 함께 '세계 3대 상인'으로 꼽히는 네달란드 무역상들은 셈이 밝고 수완이 좋았다. 거기에는 독립 이전부터 중개 무역을 해 오며 쌓아 온 노하우도 한몫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은 동인도주식회사였다.


'동인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콜롬버스의 실수 때문이다.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한 콜롬버스는 죽는 날까지 자신이 발견한 땅이 인도라고 믿었고, 당시 대부분 사람들의 생각도 그러했다. 시간이 흘러 아메리카 대륙이 인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뒤에도 사람들은 이미 인도라는 이름에 익숙해진 아메리카를 서인도, 진짜 인도를 '동쪽에 있는 인도'라는 뜻에서 동인도라고 부르게 되었다.

동인도회사는 영리를 추구하는 사기업이었지만, 정부로 부터 독점적 권한을 위임받은 특수기업으로서 식민지 개척과 경영을 위한 첨병 내지는 전위기구의 역할도 하였다. 나아가 1602년 네달란드 정부는 난립하던 민간 기업들을 하나로 묶는 '합동 동인도회사'를 만들었다.

동인도회사는 세계 최초의 다국적 기업이라 부를 만 하다. 이 회사는  오늘 날의 기준으로 보면 '종합상사'였으며, 거기에 더하여 조선, 해운, 금융 등 다양한 영역에서 수익 사업을 벌였으며, 인도뿐 아니라 말레이지아, 인도네시아, 멀리는 일본까지 진출해 있었다. 바람직한 목적으로 그런건 아니었지만, 동인도회사는 이미 400년 전에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이 난학(蘭學)이라는 이름으로 네달란드의 문물을 받아들인 것도 이 동인도회사를 통해서였다. 항해 도중 난파를 당해 조선에 표류한 외국인 벨테브레(박연)과 하멜의 직업도 동인도회사의 서기였었다.

그러나 네달란드의 화려한 시절은 오래가지 않았다. 잉글랜드에서 청교도 혁명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국내의 혼란을 안정시킨 올리버 크롬웰이 나라 밖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1652년부터 1674년까지 잉글랜드와 네달란드 간에는 세 차례나 전쟁이 벌어졌고, 결과적으로 잉글랜드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무역과 금융업에서는 세계 정상을 달리던 네달란드였지만 군사력 면에서는 에스파냐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잉글랜드를 상대하기는 어려웠다.

동인도회사라는 이름이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하는 것은 잉글랜드의 동인도회사가 인도 침략에 앞장서면서 부터다. 동인도회사를 통한 잉글랜드의 식민지 수탈 수법은 후발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에 적지않은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동인도회사를 본뜬 동양척식회사를 설립해 우리나라를 수탈했기 때문이다.  


나머지 3개 사건은 다음 글에서 알아보도록 하겠다.
잊혀지지 않는 세계의 10대 사건(下)
아편전쟁(1846년), 검은 목요일(1929년), 석유파동(197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