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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잊혀지지 않는 세계의 10대 사건(下)

이 글은  도서 '세계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에서 임의로 10개의 사건을 발췌하여 작성하였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남은 3개의 사건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


이번 글에서 소개되는 3개 사건은 근대사에 해당하는 사건이며, 그 중 2개의 사건은 지금도 전 세계가 겪고 있는 경제 위기, 에너지 문제와 무관하지 않아 씁쓸하며, 역사는 반복된다는 사실에 또 하나의 사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유럽의 팽창과 근대 시민 사회의 형성(계속)

유럽 사회는 18세기 두 가지 거대한 전환점을 맞이했다.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이다.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시민혁명은 수천 년간 이어 온 정치 체제를 변혁시켰고, 산업혁명은 불과 몇년 만에 인간의 생활 방식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다.

8. 1840년 : 아편전쟁

영국과 중국의 긴장 관계 폭발

☞ 1838년 : 영국에서 노동자들이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는 차티스트 운동이 일어났다.
☞ 1842년 : 아편 전쟁의 결과로 중국과 영국 사이에 난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 1856년 : 애로호 전쟁이라고 불리는 제2차 아편 전쟁이 일어났다.

19세기 초 서구 열강들이 중국을 노리고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을 무렵, 중국 대륙의 지배자 청나라는 이미 덩치만 큰 '종이 호랑이'가 되어 있었다. 우물 안의 개구리의 기나긴 잠을 깨운 사건은 바로 '아편 전쟁'이었다.

원래 중국은 영국에 차를 수출했고, 영국은 중국에 모직물을 주로 수출했다. 차를 좋아하는 영국인들인지라 중국 차의 수요는 갈수록 늘어났지만, 영국산 모직물은 중국에서 별 인기가 없었다. 대중국 무역적자를 해소하고 차를 수입하는데 필요한 은을 구하기 위해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찾은 수출 대체품은 바로 아편이었다.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것과 비례해 아편 수요는 증가했고, 아편 소비가 늘어나는 만큼 다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1830년대 중국 내의 아편 중독자는 무려 200만 명을 헤아렸다.

그러자 1836년 청나라 정부는 아편을 금지하기로 했다.
그래도 영국이 몰래 아편 무역을 계속하자 1839년 임칙서를 흠차대신(황제의 특명을 받고 파견되는 대신)으로 임명해 개항장 광저우로 파견했다.

강직한 임칙서는 정박해 있던 영국 상선을 기습적으로 수색해 2만 상자에 이르는 아편을 몰수했다. 1,425톤에 잘하는 아편은 모두 폐기 처분되었고, 아편을 팔던 영국 상인들을 마카오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런 조치에 영국 정부를 발끈하게 하였다. 적반하장은 이런 경우가 아닌가 한다.


의회에서는 원정군 파견을 놓고 표결에 부친 결과 전쟁이 결정되었고, 곧바로 의회는 파병 예산을 승인하였으며, 이에 따라 영국은 4,000여 명의 원정군을 중국에 파견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국과 청나라간에 발생한 분쟁이 1840년에 발발한 아편 전쟁이다.

대영제국이 마약을 팔기위해 남의 땅에 쳐들어갔으니, 제국주의 시대에 벌어진 수많은 전쟁 중에서도 가장 탐욕스럽고 더러운 전쟁이라 불릴 만하다.

1842년 청나라는 영국에 항복했다. 그리고 전쟁의 뒤처리를 위해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난징 조약이 맺어졌다. 아편 전쟁은 이빨 빠진 늙은 호랑이 청나라가 유럽 열강들 앞에 자신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었다.

청나라 입장에서 아편 전쟁은 약육강식의 냉엄한 세계 질서 속에서 스스로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깨닫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이후 중화 의식에 부응하지 못하는 청 왕조의 무능과 실정에 대한 반발은 태평천국 운동의 불씨가 되기도 하였다. 

<제2차 아편전쟁> 아편전쟁의 참패는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그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그 위에 소금을 뿌린 치욕적인 사건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제2차 아편전쟁이다.
난징조약은 영국의 기대에 비해 뚜렷한 성과를 남기지 못했다. 중국은 5개 항구의 개항도 미루었고, 내륙 지역에 외국인들의 출입을 허락하지도 않았다.

결국 1857년 영국과 프랑스 연합군이 광주를 점령하고 이듬해 텐진을 공략했다. 텐진은 베이징의 코앞이다. 다급해진 청 조정은 러시아의 중재로 텐진조약을 맺고서야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조약을 맺은 후 청이 불만을 제기하며 조약 사항을 이행하지 않으려 들자 열강들은 다시금 군대를 동원해 청 조정을 위협했다. 그리고 추가로 베이징 조약이 맺어졌다. 

이들 조약으로 중국은 난징 조약 때 약속한 5개 항 외에 10개 항을 추가로 개항하였고, 개항장 외에도 외국인의 내륙 진출을 허가하게 되었다.


   격동의 20세기

세계대전으로 시작한 20세기, 두 차례의 세계대전은 전 세계에 정치적, 경제적 혼란을 몰고 왔고, 이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문으로 귀결되며 철학적, 예술적, 사상적 혁명을 일으키는 원인이기도 했다. 
또한 20세기는 문명과 기술 발전에 있어서 인류가 지난 수쳔 년간 이룩해 온 것보다 더욱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시기이기도 하다.

9. 1929년 : 검은 목요일

미국의 대공황과 세계의 경기 침체

☞ 1929년 : 10월 24일 월스트리트 주직시장이 붕괴했고, 10월 28일에는 런던 주식시장이 하락하며
                 세계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 1933년 : 미국 32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루스벨트가 미국 정부의 경제 정책을 일신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후 미국은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국제 사회의 새로운 리더로 급부상한 미국은 오랜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유럽의 전후 복구 사업에 뛰어들어 막대한 수익을 챙겼다. 10년 동안 공업 생산량은 90%나 늘어났고, 세계 경제의 새로운 중심이 된 월스트리트의 증권거래소는 1920년대에 유례없는 호경기를 맞았다.

미국인들의 단꿈이 악몽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은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부터다. 증권거래소가 문을 열자 주식이 느닷없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소식에 놀란 은행가의 큰손 다섯 명이 방어에 나섰다는 소식이 들리면서 주가는 잠시 안정을 되찾았다.

그러나 검은 목요일의 끔찍함이 채 가시기도 전인 닷새 뒤 10월 29일 화요일, 주가가 다시 폭락했다. 주가지수는 하루 만에 반토막이 나고 말았다. 하루 사이에 약 100억 달러가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른바 비극의 화요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듬해 여름까지 주가는 바닥을 모른 채 미끄러져서 검은 목요일이 시작되기 이전 시점의 8분의 1까지 내려갔다. 대공항이 시작된 것이다. 

대공황의 실마리는 미국경제의 황금기인 1920년대에 이미 잉태되어 있었다. 기업 우대 정책은 과잉생산을 불러왔고, 그 결과 창고에 재고가 가득 쌓이게 되었다. 1923년부터 1929년 사이 기업 이윤은 62%나 늘어났지만, 노동자들의 평균 실질소득은 11%밖에 늘어나지 않았다. 노동자의 구매력이 기업의 생산 수준을 따라가지 못하게 된 것이다. 생산을 물건을 팔지 못한 기업들은 잇따라 부도를 내기 시작했다.


미국 전체 은행의 80%에 해당하는 6,000여 개의 은행이 문을 닫았다. 은행에 예금한 이들은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되었다. 노동 가능 인구 4명 중 1명이 실업자가 되었다. 미국에서 시작한 공항은 전 세계로 파급되었으며, 세계 무역량은 70% 넘게 줄어 들었다.

1933년 프랭클린 D. 루즈벨트가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루즈벨트 정부가 내놓은 해결책은 국가가 적극적으로 경제에 개입하는 '뉴딜정책'이었다. 뉴딜 정책의 성공은 자유방임주의를 강조한 애덤 스미스의 신화를 허물고, 고용 창출 등 정부의 적절한 개입을 주장한 케인즈 학파의 수정자본주의 패러다임이 안착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혹독한 시련을 겪기는 했지만 미국은 공황의 늪에서 서서히 벗어났다. 그러나 미국에 반하여, 패전국 식민지를 모두 빼앗기고 천문학적인 배상금까지 지고 있던 독일과 이탈리아, 조선(그 때의 명칭임)을 제외하고는 변변한 식민지가 없던 일본은 탈출하려 하면할수록 빠져드는 불황의 수렁을 벗어나기 위해 다른 해법을 선택했다.

바로 파시즘과 전쟁이다.  이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


10. 1973년 : 석유 파동  

석유의 정치학

☞ 1960년 : 석유수출국기구 OPEC이 결성되었다.
☞ 1973년 : OPEC이 석유 수출을 금지하고 제1차 석유 파동(오일 쇼크)이 발생했다.
☞ 1980년 : 9월 이라크가 이란에 대해 선제 공격을 가함으로써 이란-이라크 전쟁이 발발했고,
                석유 가격이 절정에 이르렀다.

20세기는 석유의 시대였다. 석유는 검은 황금으로 불리며 세계를 움직이는 에너지원으로 군림했다. 미국이 20세기의 패권 국가가 된 것도 석유를 장악하면서 부터였다. 석유는 때로는 전쟁의 동기가 아닌 무기가 되기도 했다. 바로 석유 파동 때 그랬다.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6일 전쟁에서 빼앗긴 시나이 반도를 비롯한 이스라엘 점령지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제4차 중동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쟁의 의미는 이전 중동전쟁과는 달랐다. 중동의 산유국 그룹이 결성한 OPEC가 원유 생산량을 줄여 가격을 올리는 방법으로 미국과 이스라엘을 압박하고 나선 것이다. 제1차 석유 파동의 시작이다.  

10월 13일 골다 메이어 이스라엘 총리는 닉슨 미국대통령에게 구조 요청을 하였으며, 공수되던 무기들은 돌풍으로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원조 계획이 들통 났다. 그러자 아랍산유국들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10월 16일 쿠웨이트에 모인 OPEC 대표들은 원유 가격을 배럴당 2.9달러에서 5.11달러로 대폭 인상하기로 결정했다.

고삐가 풀린 원유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이듬해 1월 OPEC이 공시한 원유가는 11달러를 넘어섰다. 1970년과 비교하면 열 배로 치솟은 가격이었다. 세계 경제는 곧바로 휘청거렸다.
이후 석유를 수입하는 국가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국제에너지기구(IEA)가 창설되어 OPEC의 횡포에 대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파동은 한 차례로 그치지 않았다. 자원이 무기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아랍의 산유국들이 손에 쥔 강력한 무기를 그냥 둘 리 없었다. 1978년 12월 17일 알 오비타 OPEC 회장이 다음 해 원유 가격을 14.5% 인상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하면서 제2차 석유 파동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야토라 호메이니가 권좌에 오르면서 이란이 원유 수출을 중단하였다.

예방주사를 한 번 맞았기 때문일까, 세계적으로 제2차 석유 파동의 충격 여파는 제1차 석유 파동 때에 비하면 크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라가 2차 석유파동으로 입은 피해는 매우 컸다. 제2차 석유 파동 당시에는 6.4%의 경제성장률(1979년)이 마이너스 5.7%(1980년)로 추락한 것이다.이는 중화학공업 육성의 결과로 에너지 소비가 급증한 탓이었다.

석유 파동은 흘러간 옛 이야기가 됐지만 에너지 문제는 여전히 우리에게 중요한 화두로 남아 있다.
미리 준비하지 않은 이들에게 에너지 문제가 가져 올 파급효과가 어떨지에 대한 뼈아픈 교훈을 남겼다. 그러나 아직도 대체에너지 준비 부족과 국제 석유가격에 일희일비하는 우리의 모습은 변함이 없는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