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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물보다 진했던 핏빛 조선왕족사(1)


역사에 관심이 없어도 대한민국 사람이면 '조선왕조실록'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의 창업자인 태조(이성계)에서 부터 조선의 마지막 왕(고종부터는 황제라 하였음)인 철종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년)의 역사를 편년체(역사적 사실을 일어난 순서대로 기술하는 역사 서술의 한 방식)로 기록한 책이다.


요사이 단종, 수양대군(세조)과 관련된 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어, 그 시기에 조선의 왕이었던 문종, 단종, 세조에 대한 관심이 높은 것 같다. 이들 3명이 왕으로 있었던 기간은 1450년부터 1468년까지 19년 동안이다.

이 기간은 조선 왕조 472년으로 볼때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조선왕조의 어느 기간에도 없었던 피비린나는 시기였음에 틀림없다.

앞으로 3회에 걸쳐 문종실록, 단종실록, 세조실록 순으로 실록의 기록 중 흥미로운 얘기 위주로 알아보겠다. 조선왕조의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 이들 3명 왕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아보는 것도 매우 흥미로운 시간이라 생각된다.

   문종실록(1450 ~ 1452년)

문종(제5대, 1414~1452년)은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큰 아들로, 세종 3년(1421년)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450년 2월 세종의 뒤를 이어 37세로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왕위에 오른지 2년 4개월만에 운명을 달리했다.

그의 능은 현릉(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으로, 현덕왕후와 함께 묻혀 있다.

                                                                                                                                                                ▲ 홍살문
▼ 헌릉


문종실록은 문종 즉위년(1450년) 2월 22일부터 문종 2년(1452년) 5월 14일까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모두 13권 12책 총 13권이었지만, 한 권(제11권)이 결본이다.   

문종실록은 편집 도중 계유정난이 일어나 황보인, 김종서 등 집권 대신들이 죽임을 당해 편찬의 실권은 수양대군 일파에게 넘어갔다. 따라서 문종실록은 신빙성이 낮은 것이 많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임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 최초의 동성연애 사건

문종이 세자 시절인 1431년 두번째 세자빈으로 궁에 들어온 봉씨는 세종 14년 세자가 자신에게 무관심하자 동성연애에 빠지고 말았다. 이때 19세의 세자는 15세의 권씨와 밀애에 빠져 있었고, 이어 임신하게 되자 권씨는 후궁(정4품 승휘)으로 봉해졌다.  

권씨가 후궁으로 봉해지기 전 19세였던 순빈 봉씨는 이미 시비 소쌍이와 동성연애에 빠져 있었다.
세종 15년 3월 승휘 권씨는 세종의 첫 손녀를 낳았으나 하루만에 죽었다.
그래도 세자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승휘 권씨가 또다시 임신하자 세자빈 봉씨는 생트집을 잡아 승휘 권씨를 유혈이 낭자하게 종아리를 때렸다.

이를 전해들은 소헌황후의 노여움에 혼이 난 봉씨는 용서를 빌면서도 마음속으로 한을 품으며 '나야 말로 명색만 세자빈이구나. 정4품 승휘를 불러 종아리를 쳤기로서니..., 무엇이 잘못이란 말인가?' 한탄했다.
"소쌍아! 어서 술상이나 내오느라. 속이 타는구나."

세종 18년 봄, 승휘 권씨는 세종의 첫 손녀 경혜옹주(드라마속의 경혜공주이다)를 출산했다.

그해 가을, 창덕궁 세자의 침전 뒤 꼍에서 세자빈 봉씨의 총애를 차지하려는 소쌍이와 석가이가 심하게 다투었다. 나중에 이 소란을 알게된 세자는 창피했지만 어머니 소헌왕후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소헌왕후는 세자빈 봉씨에게 물었다.
"세자가 내전을 비운사이 시비를 데리고 논 것이 사실이더냐?"
"저도 여자인데 사내를 그리는 정을 어찌 잊고 살겠나이까?"
"그래서?"
"궁중의 긴 밤에 필부도 제짝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저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홀로 밤을 지새워야 합니까? 그렇다고 제가 사내와 정을 나눈 것도 아니고요."
"기가 막혀서!"

억장이 무너진 소헌왕후는 세종에게 그녀의 행실을 고했으며, 난감해진 세종은 조정대신들과 논의할 수 밖에 없었다. 대신들은 그녀를 사형으로 다스리라는 주청을 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세자빈 봉씨의
첫번째 죄는 궁녀와 동성연애 한 것이요. 
두번째 죄는 궁녀에게 음탕한 노래를 부르게 한 것이요.
세번째 죄는 궁중에서 술을 마신 것이요.
네번째 죄는 소헌왕후가 내린 '효경', '열녀전' 등을 버려둔 것이요.
다섯번째 죄는 시기와 질투로 승휘에게 매질한 것이요. 

이 사건으로 궁녀들은 날벼락을 맞았고 세자빈 봉씨는 극형만을 면한 채 친정집으로 쫓겨 갔다.
그러자 아버지 봉여는 딸에게 다시 태어날 때 사내가 되라며 목을 졸라 죽이고 자신도 자살하였다.

이 사건에서 조선시대 여성들의 성의식과 조선 궁중의 성문란을 엿볼 수 있다.    

문종의 예언

문종은 몸이 좋지 않은데다 어린 아들때문에 건강이 더 악화되었다.

어느날 저녁 문종은 집현전 학사들인 성삼문, 박팽년, 신숙주 등과 술자리를 가졌다.
"세자(훗날 단종)는 세상에 태어난지 아흐레 만에 엄마를 잃은 불쌍한 아이요. 과인이 죽고나면 세자가 나이가 어려 걱정되는구려."
"신들이 비록 학자신분이지만 주상전하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왕세자 저하를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치겠습니다."

문종때 3정승은 영의정 황보인, 좌의정 남지, 우의정 김종서 였다.
3정승이 문종의 부름을 받고 입궐했다. 문종은 그 자리에 세자를 불렀다. 세자는 12세였지만 또래보다 성숙해 보였다. 그자리에서 3정승과 세자는 문답을 나누었다.

이런 세자를 김종서가 한껏 칭찬했다. 곧 문종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말하길,
"세자에게 삼촌이 너무 많은게 걸린다오. 과인때문에 지금은 평온하지만 내가 죽으면 분명 회오리 바람이 불어 닥칠 것이오. 내 뒤를 이은 세자가 아무리 총명해도 궁중의 비바람을 어찌 막아내겠소."

그렇지만 3정승은 입을 굳게 다물고 있자 문종은 말을 이어 나갔다. 
"과인은 병세로 보아 곧 죽을 날이 다가온듯 하오. 3공들은 내가 죽은 후 어린 세자가 보위에 오르면 집현전 여러 학사들과 함께 잘 보필해 주길 바라오."
"알겠습니다. 폐하. 신들은 폐하의 말씀을 받들어 목숨을 걸고 세자 저하를 지켜 내겠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문종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고, 그의 염려가 예언이 되었다.


다음 글에서는 문종의 아들이며 조선 6대 왕인 단종의 실록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자료 : '조선왕조실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