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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과학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우주의 행성들이 태양이 아닌 지구를 중심으로 회전한다는 천동설은 오랜 기간 동안 인간이 믿어온 우주관이다. 그리고 이러한 천동설의 중심에는 당시의 종교계가 큰 역할을 했다. 신의 창조물 중에 가장 뛰어난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야말로 우주의 중심이라는 천동설은 그 당시에 종교계의 우주관이었다.

 

 

 

 

 

이처럼 지구 중심의 우주관은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유래하며, 프롤레마이오스의 천문 연구와 교회의 권위를 등에 업고 오랜 세월 이어졌다. 그런데 이러한 우주관에 반기를 든 인물이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교회에서 일하는 일꾼이었다.

 

그의 이름은 니콜라스 쿠페르니쿠스이다.

 

 

 

모순의 사나이인 쿠페르니쿠스

 

코페르니쿠스는 교회 주교로 있던 외삼촌의 손에서 자랐다. 1503년 페라라대학에서 교회법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파라우엔버그 성당의 참사회에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기에 코페르니쿠스는 자신이 연구하는 내용(지동설)과 종교적 신념 사이에서 평생을 갈등한 인물이다. 그러면서도 코페르니쿠스는 교회 역시 연구의 방편으로 활용했다. 바로 교회 첨탑에 올라 별을 관찰했던 것이다.

 

 

 

 

 

코페르니쿠스가 천동설에 회의를 품은 계기도 다름아닌 신앙심 때문이었다. 쿠페르니쿠스는 항상 "신은 왜 복잡한 우주를 만들어서 행성이 지구 주위를 돌게 한 걸까?"하고 의문을 가졌다.

 

지구를 비롯한 여러 행성이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한다면 훨씬 단순하고 논리적일 텐데 말이다. 이러한 고민 때문에 늘 연구에 몰두했던 쿠페르니쿠스는 대성당의 탑에 올라 홀로 고독하게 별을 관찰했다.

 

그리고 코페르니쿠스는 태양이 가운데 자리하고 있으며 그 주위를 지구와 여러 행성이 회전하며, 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데 걸리는 시간이 일 년이라는 확신이 점점 커지게 되었다. 그 때까지의 연구를 바탕으로 『주해서』 초본을 집필했는데 여기에는 1510년부터 1514년 사이에 코페르니쿠스의 초창기 이론이 담겨 있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는 교회의 반발을 우려해 『주해서』를 발표하지 않고 대신 지인들에게만 회람시키는 이중적인 모순된 모습을 보였다. 기존 교회의 주장(천동설)과 자신의 입장(지동설)에서 갈등하는 코페르니쿠스의 태도는 진정한 과학자의 모습은 아니었다.

 

 

 

교회의 반발과 지동설의 인정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에 대한 연구를 1530년에 마쳤다. 20여 년의 세월에 걸친 연구 결과는 이미 유럽 전체에 퍼져 있었고 교황도 잘 알고 있었지만 코페르니쿠스는 이를 발표하지 않았다.

 

친구들은 연구 결과를 발표하라고 독려했지만, 교회의 눈치를 보는 쿠페르니쿠스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던 코페르니쿠스는 임종 직전인 1543년에 평생 연구 결과를 모은 책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를 최종 발표했지만 학계에서는 외면했다. 초창기 『주해서』에서 주장한 이론의 단순성이 깨져 있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카톨릭 교회에서는 천동설에 반하는 이론을 주장한 쿠페르니쿠스의 책을 금서로 지정하였으며, 1616년이 되어서야 교회로부터 해금이 되었고, 그로부터 200여 년이 더 지나서야 완전히 금기가 풀렸습니다. 1835년이 되어서야 쿠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공식적으로 널리 인정 받게 되었다.

 

 

 

 

 

훗날 또 한 명의 천재적인 천문학자인 요하네스 케플러에 의해서 쿠페르니쿠스의 복잡한 이론은 단순화되었는데, 바로 행성은 원이 아니라 타원을 그리며 운동한다는 것으로 이는 쿠페르니쿠스가 원했던 단순함 이었다. 그러나 그 이외의 쿠페르니쿠스의 이론은 모두 옳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쿠페르니쿠스를 지동설을 처음 주장한 천문학자로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