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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과학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

 

 

모두들 코페르니쿠스는 지동설을 처음 주장한 천문학자로 기억한다.

 

그러나 코페르니쿠스가 임종 직전에 발표한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는 평생 연구한 내용을 집약한 저서임에도 학계에서는 외면 받았다. 지동설에 대한 종교적 입장 때문에 카톨릭으로 부터 금서로 지정된 이유와는 다르게 그 당시로는 혁명적인 이론이었음에도 학계에서 그의 이론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한 가장 큰 이유는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이 행성은 완벽한 원운동을 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코페르니쿠스의 주장은 천동설만큼이나 복잡한 양상을 띠어, 처음에 발표했던 『주해서』에서 주장한 지동설 이론의 단순성을 크게 훼손하였다.

 

[관련글 링크]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바로가기

 

 

 

케플러의 깨달음, 원이 아니라 타원이었어

 

"케플러는 꾸벅꾸벅 졸다가 섬광처럼 스치는 생각이 있어 무릎을 탁 쳤다. 맞아, 행성은 원아 아니라 타원 궤도를 도는 거야!"

 

 

 

 

 

케플러는 브라헤가 근 20년 동안 관측하여 기록한 자료를 토대로 화성의 궤도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16세기 후반의 최고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가 없었다면 천문학계의 계보에 케플러는 없었을지도 모른다.

 

티코 브라헤는 케플러가 튀빙겐 대학 시절에 작성한 논문을 우연히 보고 케플러의 재능을 간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1600년에 케플러는 브라헤와 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601년 브라헤가 죽은 후 케플러는 황실 수학자 자리를 이어 받았고, 그가 보유했던 관측 기록도 물러 받았다.

 

그러나 케플러는 브라헤의 자료를 토대로 8년간이나 연구와 관측을 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깜빡 졸던 케플러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머릿속에 한 줄기 섬광이 스치고 지나갔다.

 

'행성은 완전한 원을 그리며 공전하는 게 아니야!' 즉 행성은 납작한 원, 초점이 두 개이고 이 두 초점이 타원을 그리며 공전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코페르니쿠스와 프톨레마이오스가 아무리 애를 써도 행성 운동을 예측할 수 없는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것 이다.

 

케플러는 단순한 수학식 하나로 이 모든 것을 설명하였다.

 

 

 

케플러의 업적, 행성 운동 법칙

 

케플러는 1609년 『신천문학』 지에 행성 운동의 제1 법칙과 제2 법칙을 발표했다. 그리고 10년 후인 1619년에는 『조화의 요소』에 행성 운동의 제3 법칙을 발표했다. 이 세 법칙을 '케플러의 행성 운동 법칙'이라고 부른다.

 

먼저 행성 운동 제1 법칙은 케플러가 처음에 발견했던 타원 궤도를 수학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타원의 두 초점 가운데 한 곳에 태양이 있고 그 주위를 행성이 타원을 그리며 공전한다.

 

 

 

 

 

행성 운동 제2 법칙은 행성의 궤도는 타원형이므로 행성은 태양 근처를 지나갈 때도 있고 태양에서 멀어질 때도 있다는 법칙이다. 2 법칙에서 중요한 사실은 행성이 태양 근처를 지날 때는 공전 속도가 빨라지다가 태양에서 멀어지면 공전 속도가 느려진다는 사실이다.

 

행성 운동 제3 법칙을 사용하면 행성 간 거리를 계산할 수 있다. 행성의 주기(행성이 완전히 한 바퀴 공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의 제곱은 행성과 태양 사이의 거리의 세제곱이라는 걸 케플러가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케플러는 『꿈, 달의 천문학』이라는 공상과학 소설도 발표했다. 그리고 1604년에는 초신성도 발견하는 행운도 누렸다.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적 한계를 간단한 수학식 하나로 공고히 한 케플러는 유명세에서는 덜할 지 몰라도 지동설이 전면 수용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위대한 천문학자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