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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다시보는 한국사(2) - 세계에 이름을 알린 고려


우리나라의 국호인 대한민국의 영문명은 코리아(Korea)이다.
전 세계가 한반도에 위치한 국가의 존재를 코리아로 알기 시작한 건 고려시대이다.
코리아라는 명칭은 고려에서 비롯된 것이다.

                              ▲ 고려 궁궐터(개성 만월대)

이번 글에서는 고려시대의 여러 사건 중 고려의 북진 정책을 보여준 만부교사건, 치욕적인 원과의 외교관계 그리고 고려의 멸망을 가져온 위화도 회군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한 고려

고려는 왕건이 외세의 도움없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건국한 이래 500년간 이어졌다.
후반기 몽골의 침략이 있기 전까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자주적인 국가였으며, 스스로를 황제국이라 칭할 정도로 동아시아 역사의 중심에 있던 나라였다.

또한 송, 원 등 중국 대륙의 주인이 계속 바뀌는 중에도 고려는 전 세계에 그 이름을 떨친 국가였다.


만부교사건(942년)

만부교 사건은 고려 태조(재위918~943)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대외 정책 기조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942년 10월, 수도 개경의 보정문 안에 있는 다리 만부교에서 거란 태종이 고려에 예물로 보낸 낙타 30마리가 굶어죽고 낙타를 고려까지 몰고 온 거란 사신 30명이 먼 섬으로 유배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려가 만주 지역의 강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거란을 상대로 외교적으로 흔하지 않은 초강수를 둔 셈이다.
거란과 외교 관계를 끊는 것은 물론이고,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의지를 공개리에 천명한 것이었다.

대내적으로는 후삼국 통일에 따른 사회 통합이 시급한 과제였지만,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의 계승을 표방한 나라로서 고구려와 발행의 옛 땅을 회복하기 위한 북진 정책이 최대 화두였다.
여기에는 신라와 후백제의 멸망으로 국가 간 통일은 이뤘지만, 옛 고구려의 영토는 수복하지 못했다는 의식이 갖고 있던 태조는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이 친선의 표시로 보낸 낙타와 사신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태조가 후손에 대한 가르침으로 남긴 '훈요십조'에도 북방 외교정책의 기조가 담겨있다.
태조의 북진 정책은 후대로 이어졌다.

거란의 동방진출은 960년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보다 현실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거란은 985~986년 두 차례에 걸쳐 요동 정벌에 나서 여진을 누르고 발해 유민이 압록강 중류에 세운 정안국을 멸망시켰다.

송나라와 여러차례 공방전을 벌인 거란은 요동 지역과 고려에 대한 지배권을 우선 확보하는 것이 무엇보다 절실하다고 판단하였고, 993년 압록강을 넘어 고려를 무력 침공하게 된다.

고려 태조가 만부교 사건으로 거란과 대립각을 세운 지 50여 년만이었다.
26년간에 걸친 고려와 거란의 전쟁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원나라의 부마국인 된 고려

1270년, 고려 조정이 몽골군에 항복해 39년 강도시대를 마감하고 환도하면서 고려는 원 간섭기에 접어든다.


원의 속국으로 전락한 고려는 이후 80여년 동안 원의 내정간섭으로 자주성의 위기를 겪는다.
먼저 원나라는 고려 국왕을 원의 공부와 결혼시킴으로써 고려를 부마국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고려 국왕과 원의 공주 사이에 태어난 왕자는 원에서 성장하며 교육을 받아야 했고, 자라서는 원의 공주와 결혼한 뒤 즉위 시기에 맞춰 귀국했다.
원은 이를 간접 지배의 한 수단으로 삼았다.

25대 충렬왕에서 31대 공민왕까지 일곱 명의 국왕이 원의 공주를 왕비로 맞았다.
원은 또 고려의 동북 지역에 쌍성총관부, 서북 지역에 동녕부, 제주에 탐라총관부를 세워 내정에 개입했다.

고려가 원의 속국이 되면서 왕실 용어와 관제 등도 격하됐다.
원은 충렬왕이 즉위하면서부터 국왕이 묘호에 조나 종 대신 왕을 붙이도록 했고, 폐하는 전하로, 태자는 세자로 바꿨다.

원의 황제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충렬왕부터 충정왕까지 6명의 국왕 이름 첫 자에 '충'을 붙였다.
관제는 2성 6부에서 1부 4사로 격하했다.

이와 함께 고려는 공녀와 금, 은, 인삼, 잣, 매 등 각종 공물을 바치며 인적, 물적으로 엄청난 수탈을 당해야 했다.

부와 권력을 독점한 외척, 사회의 내분, 무신들의 권력투쟁 등을 겪는 과정과 원의 내정간섭까지 계속되는 내우외환으로 서서히 국력이 쇠퇴해 갔다. 


위화도회군(1388년)

고려 말 이성계와 최영은 요동 정벌 문제를 놓고 격렬하게 대립했다.

고려는 최영의 주도로 명나라를 징벌하기 위해 요동 정벌을 추진했고, 이성계는 현실적인 한계를 들어 강력하게 반대했다.

우왕의 지시로 이성계가 지휘하는 요동 정벌군이 압록강까지 나아갔으나 위화도에서 군사를 되돌린다.
이후 이성계 일파는 우왕과 창왕, 공양왕까지 폐위하고 역성혁명을 이룬다.

최영이 요동 정벌을 강행한 것에는 이성계와 그 일파의 세력 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이성계의 발목을 요동 쪽에 묶어 두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처럼 요동 정벌론과 위화도 회군은 고려 지배층 내부의 외교 정책에 대한 갈등은 물론, 기득권을 가진 권문세가와 신진 세력간의 주도권 다툼이라는 성격을 기본적으로 띠고 있었다.


1392년 4월 이성게가 해주에서 사냥 도중 낙마해 부상을 입고 현지에 머무르는 틈을 이용해, 정몽주, 이승인, 이종학 등 온건 개혁파는 이성계 일파를 탄핵하고 귀향 보낸다.
그러자 위기감을 느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과 이성계의 동생 이화의 사위 이제 등은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피살했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지 4년여 만인 1392년 7월, 마침내 이성계는 신하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고, 다음 해 2월 국호를 고려에서 조선으로 바꿨다.

고려는 개국 474년 만에 34대 공양왕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자료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