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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사화(士禍)로 본 조선의 왕권


조선왕조는 유교 이념을 정치철학으로 삼은 중앙집권 국가이자 양반을 중심으로 국가 근간이 이루어진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왕권 강화에 도전하는 신하들과의 대립이 계속된 500년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에 막을 내린 사극(뿌리깊은 나무)에서 밀본이란 조직도 그 한 사례이다.
정도전이 꿈꾸던 왕권과 신권이 조화를 이룬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대변하는 일례이다.
물론 드라마의 허구성으로 인해 그 의미가 정확하게 전달되지는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모두 네차례의 사화가 발생했다.
연산군 4년인 1498년의 무오사화, 연산군 10년(1504)의 갑자사화, 중중 14년(1519)의 기묘사화, 명종 즉위년(1545)의 을화사화가 그것이다.

사화(士禍)는 사림(士林) 세력이 화를 입었다는 뜻이다.
다만 무오사화는 사초(史草)가 화(禍)의 원인이 되었다고 해서 '사화(史禍)'라고도 한다.


사림 세력과 훈척 세력의 대립, 무오사화 

사림파가 조선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9대 성종(재위 1469~1494) 때 였다.
성종은 세조 때부터 중앙 정치에서 세력을 형성했던 공신 출신의 훈신(勳臣)과 국왕의 인척, 외척 출신인 척신(戚臣)의 위세를 견제하고 당시 사회의 모순을 바로잡기 위해 김종직과 그 문하의 영남 사림들을 대거 등용한다.

이들 신진 사림들은 주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언론 3사에 임명돼 급속히 세력을 키워 갔으며, 이 과정에서 훈척 세력은 서서히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성종에 이어 10대 연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정치 상황은 180도 바뀌었다.
이상적인 왕도 정치를 강조하며 끈질기게 간언하는 사림파는 연산군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자연히 연산군과 사림파는 팽팽한 신경전을 벌였고, 이 틈새를 훈척 세력이 파고들었다.
그 빌미가 된 것이 사관 김일손이 쓴 사초였다.

                                   ▲ 조의제문

김일손은 자신이 사관이었던 당시 기록하였던 사초에 스승 김종직이 단종을 애도하며 지은 '조의제문'을 실었다.
'조의제문'은 중국 진나라 항우가 폐위한 초나라 의제를 추모하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는 단종을 의제, 세조를 항우에 비유한 것으로, 김종직은 이를 통해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정통성을 문제 삼고, 그를 비난한 것이다.

그런데 이 사초가 '성조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이 사실은 연산군에게 상소문으로 올려졌고, 평소 사림파를 못마땅하게 여겼던 연산군은 김일손과 표연말, 정여창, 최부 등 김종직 일파 20여 명을 비롯해 모두 50여 명을 사형에 처하거나 유배시켰다.

조정에 있던 대다수의 신진 사림이 이때 화를 입었다.
이미 6년 전 죽은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에 대해서는 무덤을 파고 관을 꺼내 시신을 참수하는 부관참시의 극형을 내렸다.

이것이 무오년에 일어난 무오사화의 전말이다.
무오사화는 사림 세력의 정치적 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훈척 세력이 이들을 몰아내가 위해 일으킨 정치적 사건이라는 성격을 띤다.

무오사화 이후 정국의 주도권은 훈척 세력에게로 넘어갔다. <자료 : 한국사를 움직인 100대 사건>


무오사화의 또 다른 의미는 왕권강화

연산군은 매우 순조로운 조건에서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성종의 적장자로 태어나 7세 때 세자로 책봉되었고(성종 14년), 12년 동안 충분한 세자 수업을 거쳐 1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그러나 연산군은 전체적으로 유리한 환경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참담하게 실패했다.

                         ▲ 연산군묘(소재 :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7, 사적 제362호)

삼사는 국왕과 국정에 대한 광범하고 강력한 간쟁과 감찰을 기본 임무로 갖고 있었다.
비판적 언론기관인 삼사의 위상이 크게 높아진 시기는 성종 때였다. 
국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이 완성됨으로써(성종 16년, 1485) 삼사를 포함한 주요 관서들은 그 기능을 법률적으로 보장받았다.


이런 제도적 변화와 함께 세조때 이후 과도하게 팽창한 훈척 세력의 권력을 약화시키려는 국왕의 의도가 작용함으로써 삼사는 국정의 필수적인 관서로 확고히 자리잡은 것이었다.
이것은 훈척 세력과 삼사가 견제와 균형을 이룬 상태에서 국왕이 최고의 결정권을 행사하는 수준 높은 유교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중요한 발전이었다.

그러나 국왕의 입장에서 보면 왕권이 상대적으로 약화된 구조라는 사실도 분명했다.
연산군은 부왕의 치세에 이뤄진 이런 체제를 대단히 불만스럽게 생각했다.
그는 강력하고 자유로운 왕권의 구축과 행사를 지상목표로 삼았다. 

즉위 직후부터 연산군과 삼사는 많은 사안에서 충돌했다.
그리고 훈척 세력과 삼사의 공방도 격화되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연산군과 훈척 세력들은 당시의 가장 심각한 폐단이 삼사라는 데 합의했고, 신중히 기회를 노린 끝에 첫 번째 숙청에 착수했다. 그 사건이 무오사화였다.


사건의 직접적인 발단은 세조를 비판한 김종직과 김일손의 불온한 문서('조의제문(弔義帝文)'과 사초)였지만, 앞서 설명한 상황적 맥락을 고려할 때 궁극적인 목표는 삼사의 능상*을 경고하는 것이었다.
(*능상 : 윗사람을 능멸한다)

연산군과 주요 훈척 세력들은 치밀한 계획 아래 제한된 숙청을 단행했다. 
사화에서 처벌된 사람은 52명으로 사형 6명(11.5%), 유배 31명(59.6%), 파직ㆍ좌천 등이 15명(28.8%)이었다.

이런 외형은 그 사건이 간접적이고 제한적인 경고였음을 보여준다.
무오사화는 왕권 강화를 위한 연산군의 고도의 전략이었을 수도 있다. <자료 : 네이버캐스트>

다음 글에서는 또 다시 갑자사화를 일으킨 연산군이 몰락하는 과정을 알아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