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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붕당정치를 이용한 숙종의 정치력 –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북벌의 꿈을 펼치지 못하고 승하한 효종에 뒤를 이어 조선 18대 임금에 오른 현종 역시 서인과 남인의 붕당정치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서인과 남인의 예()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쟁은 현종대에 두 차례나 일어나는 데 이를 예송논쟁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서로의 정치적 입장을 180도 바꾸어 놓게 된다.

 

<사진 출처 : 한국학자료센터>

 

 

기해예송과 갑인예송

1659 1차 예송논쟁(기해예송)은 서인의 승리로 끝났다.

양당의 첨예한 논쟁에 대해 현종은 서인측의 손을 들어주었다.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현종의 입장에선 당시 조정을 주도하고 있는 서인 세력을 무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해예송이 서인세력의 승리로 끝나면서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서인은 보다 강력한 정치적 입장을 갖게 된다.

그러나 1674 2차 예송논쟁(갑인예송)에서는 상황이 바뀐다. 이번에는 현종이 남인의 손을 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서인 측의 주장은 우선 효종을 깍아 내리는 의도이며 기해예송 때 서인의 압력으로 왕권의 정통성을 확립하지 못했던 현종의 자존심도 한 몫 하였다.

결국 갑인예송을 계기로 서인은 실각하게 되었고 정권의 실세는 남인이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세 차례 환국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1680년 경신환국, 1689년 기사환국, 1694년 갑술환국 등 세 차례의 환국은 남인과 서인의 권력이동을 세 차례 가져왔다. 환국이란 정치국면이 바뀐다는 뜻으로 숙종은 세 번의 환국을 단행했다.

 갑인예송에서 실권을 놓친 서인은 지난 50년간 집권당이었던 경험이 만만치 않았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은 다시 권력을 잡게 되었지만 정국은 숙종의 왕통 계승 문제가 대두되며 남인에게 반격의 기회를 주게 된다.

숙종의 정비인 인경왕후가 왕자를 낳지 못하고 사망하자 숙종은 이듬해인 1681 15세의 새 신부를 계비로 들인다. 그녀가 바로 인현왕후이다. 그러나 그녀도 5년이 되도록 후사가 없자 숙종은 초초해진다. 그때 숙종에게 등장한 여인이 장희빈이다. 그리고 1688년 장희빈은 숙종이 그토록 원했던 왕자를 생산한다.

 

<숙종 어필>

 

 

그러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궁중암투는 숙종의 여인으로만의 갈등이었을까? 인현왕후는 서인의 실세인 민유중의 딸이고 장희빈은 남인의 지원을 받고 있었으니 두 여인의 갈등은 이미 서인과 남인의 정치적 대결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희빈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숙종의 뜻에 반기를 든 송시열의 상소는 숙종을 자극하고도 남았다. 정국운영에 방해가 되는 서인들 때문에 자신의 왕권강화에 지장이 있다고 생각한 숙종은 1689년 다시 환국을 단행한다.

결국 기사환국은 장희빈을 후원한 남인세력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실각한 서인 세력은 더 큰 아픔을 겪게 되는 데 서인의 정신적 지도자인 송시열을 잃은 것이다. 송시열은 원자 정호를 반대하는 상소를 계속 올리다가 사약을 받게 된다.

 

 

붕당정치를 이용한 숙종의 정치력

1694 4월 숙종은 또 한번의 환국을 일으킨다. 그리고 권력은 다시 남인에서 서인으로 넘어갔고 남인 측의 지원으로 권력의 핵심에 있던 장희빈은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세 번째 환국은 기사환국 이후 5년간 권력을 잡은 남인의 정치력 부재에 그 원인이 있다. 집권 경험이 부족한 남인 세력의 무리한 정치는 숙종에게 부담이 되었고 거기에 더해 숙종과 장희빈의 갈등도 갑술환국을 결심하게 하였다.

 

세 차례의 걸쳐 환국을 단행한 숙종의 속 뜻은 무엇일까? 왕권강화를 위한 고도의 정치력이었다고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