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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창/동화로 보는 세상

동화 '슬픔을 꽉 안아줘' - 희노애락 감정 다루기

 

동화 '슬픔을 꽉 안아줘'

 

 

 

어느 날 엘자를 찾아 온 회색빛 슬픔, 엘자는 낯설고 우중충한 슬픔을 피해 보려고 애를 쓰지만 그럴수록 슬픔을 더욱 곁으로 다가와 엘자의 곁에 딱 붙어 따라 다녔다.

 

 

 

'넌 나한테서 달아날 수 없어.' 슬픔은 엘자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 괴롭히고 고통 속으로 몰아 넣었다. 슬픔을 떼어 놓으려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결국  엘자만 지쳐갔다.

 

 

 

엘자는 용기를 내어 슬픔을 마주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그리고 슬픔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 들어 주었다.

 

 

 

때론 슬픔의 등을 토닥이고 포근히 안아 주며 노래를 불러 주어 슬픔을 위로 하였더니 점점 슬픔은 작아지고 작아 졌다.

 

 

 

작아진 슬픔이 떠나고 커다란 기쁨을 만나는 아침이 오기를 엘자는 기다리고 있다.

 

 

희노애락 감정 다루기

즐겁고 행복한 감정에 익숙한 어린 엘자에게 찾아 온 뜻밖의 감정 '슬픔'을 엘자는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다.

 

 

 

동화의 내용을 보면 '장난감을 던지고 화를 내고 포악한 말을 마구 쏟아낸다'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볼 때 간단한 슬픔 감정이 아니라 우울증 증세도 있어 보인다. 감정에 휘둘리고 쫓겨 다니는 엘자처럼 아이들에게 감정조절은 먹는 본능을 참아야 하는것만큼이나 힘든 일이다.

 

 

 

이에 작가는 아이들에게 '슬픔'이라는 막연한 감정에 생명을 넣어 감정을 어떻게 다스려야(조절)해야 하는지를 알려 주고 있는데 이는 슬픔뿐만 아니라 기쁨이나 노여움 등의 감정 조절에도 적용 된다. 

지금 자신에게  찾아 온 감정을 당당히 마주하고 친해져야 할 필요가 있음을 설명해 준다. 하지만  감정, 특히 '슬픔'이라는 캐릭터를 작가의 의도대로 아이들이 잘 이해할지는 의문이 드는 조금 어려운 동화이다.

 

 

동화로 보는 세상

오래 전 방송에서 제한된 시간 안에 눈물을 흘려야 하는 미션을 성공시켜야 하는 아버지가 있었다. 하지만 결국 눈물이 나오지 않아 미션은 실패로 끝났다.

아버지를 최면에 걸어 눈물을 흘리려 했지만 '남자는 눈물을 흘리면 안 된다'는 강한 무의식이 아버지의 눈물샘을 막아 버렸다고 상담사가 말을 했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울 줄 모르는게 아니라 울지 않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서구에서도 남에게 눈물을 보이기 싫어해 장례식에서도 선글라스를 낀다고 한다. 그러고보면 인간은 대체로 슬픈 감정은 피하려고만 했던 게 아닌가 싶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되는 여러가지가 요인들이 있는데 그 중에 희노애락의 감정표현도 포함되어 있다.

동물 애호가들의 반론을 받겠지만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데 있어 동물과 인간은 비교의 대상조차 되지 않을만큼 인간이 훨씬 더 예민하다.

하지만 여러가지 외부 요인에 의해 사람들은 감정의 정확한 정체는 모른체 그저 막연히 조절하는 방법을 익히거나 억누르기도 하면서 일생을 살아가게 된다. 자신의 감정만 너무 앞세우면 안된다는 공동체 의식이 강한 우리의 정서상 솔직한 감정 표현은 지탄과 비난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자유롭게 조절할 수만 있다면 세상을 꽤 재미있게 살고 있다고 느끼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