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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신임의 선택, 아이 장래는 믿음과 기다림의 결과다

 

신임의 선택, 아이 장래는 믿음과 기다림의 결과다

신임의 선택

조선 숙종 때 신임이라는 벼슬아치가 있었다. 그는 청렴한 삶을 살았던 관리였으며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에게는 외동딸을 키우는 청상과부의 며느리가 있었는데 그 손녀딸이 혼기가 되자 어떤 신랑감을 원하는지 며느리에게 물었다. 며느리는 자신이 청상과부가 된 것을 생각해 80살 이상 살 수 있는 수명과 많은 재산이 있으며 장래 귀한 자리에 오를 수 있는 완벽한 사윗감을 원한다고 말했다.

어이없는  요구에 어이가 없었지만 하나뿐인 딸을 귀히 여기는 어미의 마음을 이해하고 손녀사윗감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어느 마을을 지나가다가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한참 보더니 한 아이를 불러 이름과 집을 물어보았다. 남루한 옷차림에 집안 형편도 볼품이 없는 아이였다.  신임은 며느리에게 이 아이가 손녀사윗감이라 말하고 혼사를 치루었다. 며느리는 내심 불만이었지만 시아버지의 말씀과 안목을 믿고 `한편으론 기대를 품고 사위로 맞아들였다.

그러나 사위는 기대와는 달리 허송세월을 보내었고 보다 못한 신임이 지방에 내려갈 때 그를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사위는 넉넉한 인심으로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듣고 어려운 민심을 수습하기도 해서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훗날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처음엔 볼품이 없는 아이였지만 결국 신임의 사람보는 눈이 틀리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믿음의 결과

사람의 겉모습과 달리 속마음은 겉으로는 전혀 알 길이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이것도 몇 마디 말을 시켜보면 대충 그사람에 대해서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린 아이를 보고 그 아이의 장래에 대해 장담하듯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물론 '될성부른 사람는 떡잎부터 다르다'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신임이 남편없이 홀로 아이를 기르며 사는 며느리의 가여운 삶을 위해 더 독한 매의 눈으로 손녀 사윗감을 골랐을진대 그 첫 모습이 남루하였으니 다른 이들을 걱정이 태산같았을 것이다. 지금 당장 재상가의 아들이라해도 될까말까한 혼사를 거지 모습의 신랑감을 데려왔으니 며느리의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말이다.

하지만 시아버지에 대한 믿음으로 사위로 맞아들였고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며느리의 바람대로 사위(유척기, 1691∼1767)는 오래 살았고 자손도 많았고 재산도 넉넉해졌다.

 

아이는 성원, 믿음, 기다림이 만든다

얼마 전에 관상에 대한 방송 프로그램이 있었다. 돈을 많이 버는 관상과 높은 관직에 오를 관상, 그리고 오래 살 관상, 인기에 오를 관상 등등 관상에 대한 여러가지 예를 들어주며 설명을 해주었다. 나름 일리있는 말처럼 들리지만 한편 이미 결과가 나와 있는 사람들의 관상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보여 신빙성이 없어보이기도 했다.

정말 관상에 결정된 그 사람의 생이 담긴 것일까? 노력해도 이미 결정된 운명은 바꿀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한다. 결정된 운명같은 것은 없다. 결정된 운명이라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때부터 정해진 운명이 된다고 한다. 

 

신임이 데리고 왔던 남루한 그 아이가 정말 재상의 운명을 타고 난 아우라가 신임의 눈에는 보였는지 알길이 없지만 신임이 데려왔던 그 아이가 훗날 그리 된것은 주변 사람들의 성원과 믿음, 그리고 기다림이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신임(1639 ~ 1725)

조선 후기의 문신. 1722년 신임사화로 노론의 중진들이 제거되는 것을 항의하다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풀려나 돌아오는 길에 해남에서 병사했다. 시와 글씨에 뛰어났으며, 영의정이 추증되었다.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