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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두 얼굴의 영웅 진시황 - 병마용갱, 만리장성 그리고 분서갱유

 

두 얼굴의 영웅 진시황 - 병마용갱, 만리장성 그리고 분서갱유

1974년 3월, 중국 산시성 시안 외곽의 한 시골 마을에서 발견된 유물은 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우물을 파던 농부들이 땅속에서 특이한 모양의 토기 파편과 쇳조각을 발견했고, 7월 산시성 고고학 발굴팀이 참여하자 엄청난 유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진흙으로 실물크기에 가깝게 빚은 수천 명의 병사와 말, 전차, 무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바로 2천2백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진나라 대군이 마침내 그 실체를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세계 8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리는 병마용갱이다. 중국 최초로 통일국가인 진나라를 세운 진시황의 무덤이다. 지금까지 1, 2, 3호갱이 발견되었고 발굴된 총 면적이 무려 25,380㎡(약7,700평)에 달한다. 그리고 아직도 발굴 작업이 계속되고 있다.

학자들에 의하면 당시 병마용을 만드는데 70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다고 예측하니 진시황의 권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된다.

 

그리고 또 하나, 인공위성에서도 보인다는 만리장성 또한 그의 작품이다.

 

 

만리장성은 연장 길이가 2,700km에 달하며 중간에 갈라져 나온 지선들까지 합치면 총 길이가 6,000km를 넘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한다.

 

춘추전국시대를 평정한 불세출의 영웅, 진시황

사마천의 『사기』를 보면 중국 최초의 왕조는 하이다. 그리고 상, 주, 그리고 춘추전국시대로 이어진다.

B.C 8세기경부터 주나라 각지에서 유력한 제후들이 들고일어나 패권을 다투기 시작했는데 이 혼란의 시대를 '춘추전국시대'라고 한다. 먼저 춘추시대에는 진(晋).제.오.월.초의 다섯 제후가 왕을 자처하며 다투었고, B.C 475년에 시작된 전국시대에는 제.초.연.위.조.한 그리고 진(秦) 등 전국 칠웅이 패권을 다투었다.

 

춘추전국시대에 진이라는 나라가 두 곳인데, 춘추시대의 패권국이던 진(晋)과 전국시대의 진(秦)은 영토 확장을 위해 거의 1백년을 싸웠다. 그리고 전국시대의 진()나라의 30대 군주였던 장양왕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자 그의 아들 정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르는데 그가 바로 진시황이다.   

즉위 당시는 나이가 어려 상국이었던 여불위와 태후의 신임을 얻은 노애가 섭정했으나 훗날 진시황은 노애의 반란을 진압하고 여불위를 제거해 군주로서 강력한 권력을 갖게된다. 그리고 진은 한나라(B.C 230 멸망)를 시작으로 조.연.위.초.제(B.C221)를 차례로 굴복시켜 중국을 통일한 최초의 나라로 등장한다.

통일 후 정은 '하늘의 임금'이라는 뜻의 황제라는 칭호를 만들고 자신을 시황제라 칭했다. 그렇게 시황제는 중국 최초의 황제를 뜻하는 의미가 되었다. 또한 진시황은 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휘두른 황제이기도 했다.

 

두 얼굴의 영웅, 진시황

B.C 221년, 춘추전국시대가 마감하고 진시황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하기 위해 멸망한 여섯 나라에서 쓰던 문자와 화폐를 폐지시키고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분야에 걸쳐 강력한 통일을 추진한다.

진시황은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 역사상 가장 강력한 통일 중앙집권국가를 건설하는데, 여기에는 진시황의 탁월한 인재 등용과 리더십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 이었다. 특히 '사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라는 말을 신봉한 진시황은 인재의 중요성을 잘 아는 군주였다.

 

 

그러한 진시황이 탐냈던 인물 중 대표적인 이가 한비자이다. 훗날 진이 한을 침공한 이유가 한비자를 얻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로 진시황은 한비자의 사상을 우대하고 아꼈지만, 한비자는 끝내 진시황 주변 신하들의 모함으로 독약을 마시고 만다.

그러나 일 중독자이며 완벽주의자였던 진시황은 긍정적인 평도 많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전인무도한 폭군이리는 부정적인 평가도 많은 인물이다. 분서갱유는 진시황의 부정적인 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분서갱유는 상앙과 한비자 등이 내세운 법가사상을 우대한 진시황이 일체의 다른 사상과 학문, 특히 유가를 배척해 관련된 모든 책을 불태우고 이를 어긴 유학자들을 생매장한 사건이다.

또한 역사상 가장 큰 자신의 능묘를 제작하고, 만리장성이라는 대규모 토목 공사로 국력을 낭비했다. 그리고 말년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는 데 집착한 것도 긍정적인 공을 허물어뜨리는 일이 되었다.

그 결과인지, 진시황이 죽자 각지에서 농민 반란이 일어났고, 진나라는 통일 후 불과 15년 만에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