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황소'는
갈라진 발굽과 등에 붙은 파리, 입안 가득 들어 있는 풀을 부끄러워하는 황소 에트르는 고웰농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상황을 인식하고 있다. 에트르가 '인식'하는 상황이란 자신과 같은 황소들이 언제 어디로 가서 어떻게 처리되는지를 인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희노애락의 인간적인 감정까지 느낄 수 있는 매우 특별한 황소이다. 처음에 황소 에트르는 농장에서의 삶이 그렇게 불만스럽지는 않았다. 언젠가 울타리 처진 이 농장을 떠나 엄마가 있는 자유로운 세상으로 가게 될 거라 믿고 농장주 아들의 감성 어린 노래를 들으며 아무렇지 않은 듯 살아갔다.
새 목초지로 이동 후 아름다운 암소와 사랑에 빠지고 귀여운 송아지도 낳았다. 이젠 엄마가 가신 자유로운 세상으로 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 에트르는 가족들을 데리고 농장을 떠날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자유로 통하는 문인 줄 알았던 그곳은 소 도축장이었다.
그제서야 왜 이 문을 나섰던 소들이 돌아오지 않았는지 알게 되었다. 다행히 에트르는 숫소라서 도축 직전에 빠지게 되었지만 에트르의 암소는 바로 눈 앞에서 처참하게 도축되었다.
농장으로 돌아온 에트르는 송아지를 데리고 탈출을 감행한다.
자유로운 삶
사고할 줄 아는 황소 에트르의 모습에 오래 보았던 알레스 헤일리의 '뿌리'라는 작품의 한 장면이 생각난 것은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는 모습이 닮았기 때문이다. 인간도 동물의 군에 속한다고 가정하면 길들여지지 않은 인간이나 동물은 갇힌 공간에서 살 수가 없다.
더구나 사고한다는 것은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다는 것인데 몸이 공간적인 제약을 받으면 스트레스가 더 커지고 그럴수록 자유를 향한 갈증에 목은 더 탄다. 자유를 얻기 위해 행해지는 일탈적인 행동들에 물리적인 압박이 가해지면 일시적으로 잠잠해지기는 하지만 자유에 대한 근본적인 생각은 없앨 수가 없다.
생각할 줄 아는 황소 에트르가 원했던 자유는 그의 상식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거였지만 불행하게도 그가 속한 집단에서는 인식조차 되지 못한 것이라 에트르의 갈등은 더 심했다.
다른 황소들처럼 생각 없이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생각대로 살아야 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마지막에 암소와 송아지를 모두 잃고 반쪽 짜리 자유를 얻은 에트르는 자책하듯 자신이 생각할 줄 모르는 황소였다면, 다른 황소들처럼 목장의 울타리에 갇힌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았다면 더 나았을까를 고민한다.
하지만 자신이 느낀 감정을 무시하며 사는 것은 옳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울타리를 넘어야 한다
에트르의 자유가 반쪽 짜리라고 느낀 이유는 농장을 탈출했지만 그 과정에 송아지가 죽었고 아무 생각 없이 자신을 따르다 죽음을 맞이한 송아지에 대한 미안함으로 농장 밖으로는 나왔지만 '소들의 천국'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중간 지점을 헤매고 있는 에트르의 모습 때문이다.
송아지의 죽음이 상징적인 의미라고 한다면 자유(변화)를 얻는 과정에 어느 정도는 지금의 기득권을 포기하거나 내려 놓아야 한다는 걸 말하는데 책 표지의 문구처럼 '주어진 삶에 익숙해지는 것 그보다 잔인한 운명은 없다.'
변화를 꿈꾸고 있지만 두려운가?
울타리를 넘는 수고가 있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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