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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세계문화유산 창덕궁 속에는 경복궁이 있다

 

창덕궁의 역사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면서 세운 경복궁은 정종은 물론 태종에게도 혈족간의 피비린내나는 살육의 장소로 기억되는 궁궐이었다.

조선의 정궁이지만 도저히 정을 붙일수 없었던 태종은 경복궁 옆에 이궁(유사시 임금이 머물던 궁)인 창덕궁을 짓고 그곳에 머물렀다. 창덕궁은 자연환경을 그대로 살리고 그 사이사이에 건축물을 지어 자연미를 강조한 아름다운 궁으로 인정되어 199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제되었다.

 

<창덕궁 인정전>

 

창덕궁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소실되었으나 광해군이 경복궁은 그대로 놔두고 창덕궁을 재건해 그이후 270여 년간 조선의 정궁 노릇을 해왔다. 조선왕조 500년 중 절반 이상의 기간동안 명실공히 조선왕조의 역사가 쓰여진 곳이 창덕궁이다. 

바로 곁에 정궁인 경복궁이 있음에도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을 하지 않고 왕들은 창덕궁에서 지냈다. 하지만 창덕궁도 크고 작은  화재를 몇 번씩 겪으며 재건될 때마다 외부와 내부가 변형되었다.

 

 

창덕궁과 경복궁 

편전이었던 선정전이 비좁자 대조전 앞에 있던 침전인 희정당을 편전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희정당은 원래 작은 여러개의 돌기둥 위에 세워진 아담한 집이었으나 일제때 화재로 소실되자 경복궁 강녕전 일부를 가져다 희정당을 재건하였다.

재건하면서 전기를 끌어와 내부에 샹들리제를 달고 카펫을 깔고 유리창을 만들었다. 그리고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도록 앞마당의 턱을 없앴다.

 

<경복궁 강녕전>

 

<창덕궁 희정당>

 

 

중전의 침소인 대조전도 마찬가지로 경복궁의 교태전의 일부를 가져다 재건하면서 침전엔 침대를 들여 놓고 희정당과 마찬가지로 전기를 끌어와 샹들리제를 달고 서구식 가구로 장식해 한옥 고유의 정서와 아름다움이 흐트러졌다.

대조전은 뒷편의 경훈각과 내부로 통하도록 복도와 행각이 연결되어 있는 궁궐의 복합적인 구성을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대조전에 있는 흥복헌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경술국치가 결정된 곳이기도 하다.

 

<경복궁 교태전>

 

<창덕궁 대조전>

 

 

창덕궁은 정전인 인정전과 중궁전인 대조전, 그리고 편전인 선정전과 희정당 외에 전각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어  미로를 방불케 하는 궐내각사가 인상적인 궁궐이다. 

경복궁보다 규모가 작은  궁궐이지만 대조전 뒤편에 있는 아름다운 후원(비원)으로 인해 왕족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이곳은 보존을 위해 지정된 시간에 일정 관객만 관람이 되는 곳이다.

 

<창덕궁 후원(비원)>

 

 

창덕궁의 입구인 돈화문을 들어서면 몇 백년은 됨직한 회화나무가 지나간 역사를 무언으로 전해준다. 회화나무는 조선처럼 유교를 받들던 중국 주나라에 많았던 나무인데 선비나무라 부르기도 한다. 

창덕궁과 경복궁,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두 궁궐은 같은 듯 다른 의미로 한 시대를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