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세상을 보는 창/느낌있는 여행

몽고 침략을 피해 고려 고종이 피신한 강화도 고려궁지

 

고려 태조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를 세우고 수도로 정한 곳은 개경이다.

송악산을 뒤로 하고 앞으로 사천이 개경을 가로질러 흐르는 명당자리였다. 당시 개경의 면적은 조선의 한양의 면적보다 넓었다고 한다.

하지만 몽고의 잦은 침략으로 개경을 버리고 강화도로 천도하니 강화도는 39년간 고려의 수도로 발자국을 남겼다.

 

 

 

강화도가 지목된 이유는 육상에서는 몽고에 대항할 힘이 없음을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배를 만들어 본 적도 없고 물 위에서의 전쟁 경험도 거의 없는 몽골의 약점을 이용하기에 유수가 빠른 강을 건너야 하는 강화도는 천혜의 요새나 다름없었다.

 

 

 

고종 19년에 최우가 그의 집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천도를 상의하였으나 이미 개경에 자리를 잡은 이들은 천도에 부정적이었다.

하지만 천도를 반대하던 김세충이 서슬퍼런 최우의 무력 앞에 목이 달아나자 아무도 천도를 반대하는 이가 없었고 왕은 강화도 천도를 허락하였다.

 

 

 

강화도에 세워진 고려의 새 궁궐은 개경의 규모보다는 작았지만 개경의 모습을 축소해 그대로 지었다고 한다.

황성과 궁성, 나성과 내성으로 4중의 성곽이었던 개경처럼 강화에도 성을 쌓고 뒤로 보이는 산을 송악산이라 명명했다.

 

 

 

최우가 왕을 모시고 강화도로 온 것은 고려에 대항할 여력을 키우기위해서라기보다 몽고의 침입 시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으면서 세금을 걷기에 이용이 편리한 강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경 본토의 왕이 자리를 비우자 몽고는 다시 고려를 공격하고 전 국토를 제 집마냥 휘저으며 살육과 수탈의 만행을 저질렀다.

 

 

 

몽고의 끈질긴 침략에 저항하던 고려는 백성들이 부처의 공덕으로 몽고를 몰아내자며 팔만대장경을 만들어 힘을 보탰으나 결국 몽고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몽고는 조약을 맺으며 개경으로 다시 돌아올 것과 올 때는 강화도에 있던 고려의 궁들을 비롯한 모든 흔적들을 불태우라고 하여 당시의 모습을 지금은 전혀 찾아 볼 수 없다.

당시 강화도의 인구는 개경 본토의 인구보다도 많았는데 많은 사람들이 살육 당하고 강화도 전체가 불구덩이 속에 활활 타올라 하루아침에 잿더미가 되고 말았다고 한다.

 

<조선시대 이방청>

 

 

영화 촬영지만도 못한 초라함으로 휑한 고려궁지는 몽고에 39년간 저항하느라 지친 고려의 지친 모습처럼 보인다. 

몽고를 피해 강화도에 몰래 숨어든 왕은 강화도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고 다시 강화도를 떠나고 남겨진 백성들의 망연자실한 모습이 눈 앞에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