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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Book

에너지 과잉이 주는 불행, '철학이 필요한 시간'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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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 가서 책을 고르다가 눈에 들어온 책표지의 문장이 있었다.  
"나는 왜 이러고 살지?"의 주인공들을 위한 인문 공감 에세이라는 문장에 끌려서 읽게 된 책이 작가 강신주의 '철학이 필요한 시간'이다.

동.서양의 철학자들의 인문 고전을 인용해 정신적으로 지친 현대인들에게 정신적인 치료와 위로 나아가 용기와 희망을 주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내용도 쉽고 적절한 실생활의 예를 들어서 설명하니 어렵지 않게 읽을만한 철학서적이다.

예나 지금이나 현실의 상황만 다를 뿐 인류는 비슷한 고민들을 해 온것 같다.
당시 철학자들의 말들을 지금 상황에 맞춰도 적절한 답이 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작가는 파울 첼란이라는 시인을 소개하면서 이 책을 '유리병 편지'라고 했다.
자신의 마음을 편지에 적어 유리병에 넣고 누군가에게 전해져 그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으면 좋겠다고 하였다.

내가 그 사람들 중 한 사람이 되었다.
'후회하지 않는 삶은 가능한가?' , '해탈의 지혜', '자유와 사랑의 이율배반','사랑의지혜'등 지금 우리의 생활에서 가끔은 혼동스럽게 하는 문제들의 답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그 중 '유쾌한 소비의 길'이라는 소제목의 글을 읽으면서 요즘 아이들의 폭력문제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19세기 이후 산업자본주의의 발달은 부단한 생산과 축적으로 우리 사회를 발전 시켰다.
하지만 지나친 생산과 축적이 영원히 좋은 것은 아니라고 철학자 바타유는 말했다.
그는 오히려 소비와 낭비가 더 중요하다고 했다.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쌓이면 언젠가는 마지못해서든 기꺼이든 재앙을 부르면서 반드시 대가없이 상실되고 소모되어야만 한다고 했다.  
예를 들자면 영양 과잉으로 에너지가 축적된 아이는 비만의 단계가 넘어서면 죽게 된다.
그 아이가 죽지 않기 위해서는 축적된 에너지를 어떤 방법으로든 강제 배출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더 넓게 보자면 전쟁도 과잉된 에너지의 강제 배출의 한 모습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고 한다.
바타유는 이러한 '불유쾌한 파멸'의 에너지 방출이 아니라  '유쾌한 파멸', '바람직한 파멸'의 평화스러운 에너지 방출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 글을 읽으면서 지금 매스컴을 달구고 학부모들의 가슴을 불안하게 만드는 '청소년 폭력' 문제가 떠 올랐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금 청소년들의 에너지는 충분히 과잉되어 있다.
그 에너지란 의식주처럼  기본적인 것들도 있고 과중한 학습 스트레스도 있고 예전 우리 세대들보다 지금 청소년들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각종 지식이나 정보 등을 보면 '과잉', '차고 넘친다'라는 말이 딱 맞다.

고사성어에 '과유불급'이라는 말이 있다.
지나친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말이다.
청소년들의 성장에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공급되다보니 잉여분의 에너지가 넘치기 시작한것이다.

운동이나 적절한 여가활동을 제공받지 못하자 이들의 에너지는 '불유쾌한 파멸'의 모습으로 방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강제된 흡수한 불유쾌한 에너지를 더 이상 저장 공간이 없어 감당할 수 없자 불유쾌한 감정 그대로 방출하는데 그 방출 공간이 만만한 같은 또래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 상황에 대한 책임의 대부분은 어른들에게 있는 것이고 해결책 또한 어른들이 만들어야 한다.
근본적인 해결 방법 중 하나는 아이들에게 적당한 에너지를 주는 것과 과잉 에너지를 유쾌하게 배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