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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고구려의 최고 전성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
(‘광개토대왕비문’에서)



고구려의 영토는 광개토대왕때 크게 확장되었고, 그의 아들 장수왕 때에 최대로 확장되었다.
광개토대왕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에 남아 있으나, 장수왕 때 건립된 광개토대왕비에 더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번 글에서는 삼국유사 기록을 통하여 고구려의 최대 전성기를 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에 대하여 알아보겠다.  


왕중에 왕, 광개토대왕


호태왕은 고구려 제19대 광개토대왕을 말한다. 18세때에 아버지 고국양왕을 이어 왕위에 올랐으며, 이름은 담덕이다.
광개토대왕은 20여 년 동안 고구려의 국토를 넓히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우선 광개토대왕은 백제를 공격하였다.
광개토대왕은 비려성을 공격하려고 부산(負山,지금의 부산이 아님)을 넘어 염수 근처의 부락 세군데를 습격하고 포로 67명을 얻었고, 국경지대에서 사냥을 즐겼다. 또 친히 수군을 거느리고 아리수(한강) 근처의 18성을 공격하고 백제의 도성 가까이 다가갔다.

이에 백제군이 강하게 반발하자 광개토대왕이 소리치길
"백제 왕은 들어라! 너는 우리에게 조공하더니, 선왕 고국천왕을 살해한 후 왜국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반
 항하고 있구나. 
지금 당장 용서를 빌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현명한 판단을 하라."

이에 놀란 백제왕은 남녀 1,000명과 세포 1,000필을 보내어 항복의 뜻을 표했다.

이때 고구려는 58성을 얻고 700촌을 차지했다. 대승을 거둔 광개토대왕은 백제의 왕제와 대신 10여 명을 볼모로 잡아갔다.

광개토대왕 9년, 백제가 또다시 고구려의 말을 듣지 않고 왜와 몰래 교류를 하였다. 신라는 이 사실을 사신을 보내 고구려에 알렸다. 광개토대왕은 다음해에 군사 5만을 신라에 보내어 왜를 물리치도록 했다.

광개토대왕은 신라를 도와주었다
.
그리고 광개토대왕 14년에는 왜가 대방군까지 침범하자,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 왜군을 물리쳤으며, 3년 뒤에는 5만의 군대로 백제의 사구성을 격파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 20년에는 동부여를 쳐서 고구려의 위상을 크게 떨쳤다.
광개토대왕은 18세에 왕위에 올라 39세에 승하할 때까지 21년간 남정북벌에 매진하여 성 64곳, 부락 1,400여 곳을 차지했다. 대부분의 성과 부락은 백제의 것으로 이때 지금의 임진강 부근까지 고구려에 빼앗겼다.


광개토대왕의 야심은 중원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이 당시 중원은 5호 16국 시대였다. 그리고 중원을 싸고도는 새외민족은 호시탐탐 중원을 노렸다. 고구려 서북쪽의 선비족은 16국을 나라를 만들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이때 고구려가 남방보다는 일찍 북방에 눈을 떴더라면 중원을 크게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39세로 승하한 광개토대왕은 웅지를 펼 나이에 애석하게 그 꿈을 접어야 했다. 만주의 통구 부근에 우뚝 솟은 광개토대왕비만이 아쉬운 역사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고구려의 최대 영토, 장수왕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은 아버지의 대업을 이어받아 고구려를 강성대국으로 만들려는 꿈이 있었다.

이때 중국의 고구려 동족인 나라 북연은 고운(광개토대왕 당시 북연의 왕)의 부하였던 풍홍이 임금이었다. 중국에서는 북위가 두각을 나타내었고 그 여세를 몰아 북연을 침략했다. 풍홍은 사태가 심각해지자 고구려에 기대어 재기하려고 고구려에 도움을 청했다.
장수왕은 동족의 나라가 위급한 상태라 외면할 수도 없었지만, 이번 기회에 중원으로 나아갈 발판을 만들려는 야심을 품었다.

장수왕은 갈로와 맹광 두 장수에게 수만 명의 군사를 파병하여 북연을 구하라고 명하였다. 북연왕은 고구려 군을 환대하고 두 장군을 화룡성으로 안내했다. 북위군이 회룡성 가까이 와 있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북위군에게 패배하여 고구려로 도망쳐 오고 말았다.
장수왕이 품었던 중원 진출의 기회는 이렇게 날아가고 말았다.

이때쯤 한반도에서는 신라가 점차 강해져 고구려의 장군 변장을 죽였다. 장수왕은 대노하여 신라에 공격 영을 내렸고, 신라에서는 수습에 나서 장수왕에게 사죄하고 전쟁을 면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힘이 강한 고구려는 신라의 실직주(강릉)를 점령해버렸다.

또 장수왕 63년 백제의 도성에 쳐들어가 개로왕을 죽이고 남녀 8,000여 명을 잡아왔다. 
이때부터 3국의 정세는 급변하여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견제했다. 그러나 동맹국이 고구려를 상대하기에는 아직 역부족이었다.


이 무렵 고구려의 영토는 제일 넓고 국력은 강성했다.  한반도에서는 한강을 넘어 지금의 충청도 남부 일부에서 죽령까지 이르렀으며, 강원도 일부분까지 차지했다. 북쪽으로는 만주의 대부분을 장악하였다.

그런데 장수왕은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으며,
결국 고구려는 북쪽 만주 일대를 차차 내주게 되는 비운을 맡게 된다.



물론 장수왕 때 고구려의 영토는 가장 넓었다. 그런데 장수왕은 왜 수도를 평양으로 옮겼을까?
신라와 백제를 멸망시키려 했을까? 그냥 만주 땅에 수도가 있었다면 한반도의 지도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없다지만 못내 아쉬운 대목임에는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