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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연개소문과 고구려의 멸망



서기 657년, 동북의 대호라고 불리던 연개소문이 파라만장의 생을 마감했다. 연개소문의 죽음은 고구려에만 큰 혼란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당나라를 포함한 고구려 주변국들과의 관계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올 만큼 대단한 소식이었다.



연개소문은 죽기직전 세아들을 불러 당부를 하였다.
" 내가 죽으면 너희들이 권력을 잡을 것이다. 허나 벼슬을 두고 서로 다투어서는 절대 안된다. 너희 형제
  들이 물과 고기처럼 서로 화목한다면 고구려는 강성해질 것이다.
  만약 화목하지 못하면 너희들은 당나라에 치욕을 당할 것이다. 내 말 명심하라!"


그러나 연개소문의 걱정은 불행하게도 현실이 되어버렸다.

이번 글에서는 삼국유사에 나타난 고구려 멸망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연개소문 아들들의 권력투쟁에 대해 알아보겠다. 


현실이 된 연개소문의 걱정

당 태종은 안시성 참패 이후에도 2차례나 더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나 연개소문에게 번번히 참패하여 돌아갔으며, 당 태종이 죽은 후에는 한동안 고구려와 당나라와의 전쟁은 뜸해졌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당나라에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선 것은 당나라와 신라의 동맹이 이뤄진 이후이다.
이러한 강경노선의 선택은 당나라와 긴장 관계로 늘 전운 속에서 밤낮을 보내야 했다.



서기 655년 2월, 당나라 고종은 연개소문이 와병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즉시 군대를 동원하여 고구려를 향했다. 연개소문이 와병중이라는 소문은 당나라 고종에게는 절호의 기회였다.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의 장남 연남생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막리지에 올라 고구려와 당나라의 9차 대전을 지휘하게 되었다.


남생은 당나라의 정명진, 소정방이 이끄는 군대를 귀단수에서 격퇴시키고 9차 대전을 승리로 장식한다. 그리고 이어진 두차례의 싸움에서도 고구려는 승리를 거두웠고, 그 중심에는 연남생이 있었다.
남생은 당나라와의 세 차례 싸워 전승하자 기고만장해졌다. 남생은 666년 연개소문에 이어 태대막리지가 되었다. 고구려의 정권, 병권을 거머쥔 제1인자가 된 것이다.


남생은 조정의 조직을 개편하고 인사를 서둘렀다. 연개소문 시절부터 조정에 몸담고 있는 구세력들을 신진세력으로 교체했다. 이러한 남생의 독단은 구세력의 반발을 가져왔다. 그러나 자만심에 취한 남생은 반대 세력들을 죄다 무시했다.

남생은 소수의 근위병만을 거느리고 변방 순찰에 나섰다. 언제 또다시 침략할지 모르는 당나라에 대한 경계를 튼튼히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생이 도성을 비우자 구세력들이 힘을 모아 남생 제거 음모에 나섰다. 이들을 부추긴 인물은 다름아닌 남생의 동생 남건이었다. 게다가 허수아비 신세인 보장왕의 불만이 커서 구세력의 음모는 쉽게 이뤄졌다. 음모에는 세째인 남산도 가담했다.



남생의 치욕적인 선택과 고구려의 멸망 

고구려는 내전상태에 빠졌다. 시간이 흐르수록 남건이 우세해지자 남생은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기 시작했다. 궁지에 몰린 남생은 앞뒤 가리지 않고 당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이제껏 민족의 자존심을 걸고 치열하게 싸우던 적에게 머리를 숙인 것이다. 남생의 선택은 신라가 당나라와 동맹을 맺은 것보다 더 치욕이었다.


당나라로서는 행운이었다. 고구려에 한번도 이겨보지 못한 당나라로서는 고구려의 내란은 하늘이 준 좋은 기회였다. 게다가 남생은 남건을 진압한 후 스스로 당나라의 신하국이 되겠노라고 자청했다. 당나라 고종은 30만 대군을 남생에게 보냈다.

서기 667년 9월, 당나라에서는 남생에게 요동도독겸 평안도 안무사의 벼슬을 내렸다. 고구려의 태대막리지가 요동제독이라니 말이되는 일인가? 남생은 이제 당나를 위해 동족을 죽여야 하고 형제와 조국마저 멸망시켜야 하는 민족 반역자가 된 것이다.


얼마 후, 평양성 안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았다. 남생에게 목숨을 보장받은 보장왕과 신성에 의해 수백년간 고구려가 소장해온 나라의 기밀문서와 문화재를 불태워지고 있었다. 남생은 불타는 궁성을 바라보며 깊은 후회의 가슴앓이를 했다. 속좁은 한순간의 잘 못 판단으로 결국 나라를 망친 역적이 되었으니, 죽어서 무슨 낯으로 아버지 연개소문을 본단 말인가.

궁성은 온통 화염에 싸여 밖에서 지켜보는 당나라군마저 숙연케 했다.
이미 잿더미로 변해버린 평양성에 입성한 남생은 약속대로 평안도 안무사가 되어 고구려의 주권을 당나라에 넘겨주었다. 남생은 보장왕과 대신들을 거느리고 장안으로 들어가 황제에게 항복했다. 당나라 조정은 남생에게 저택을 하사하고 장안에서 살도록 했다. 당나라 포로 신세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당나라에서는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로 삼아 평양총독으로 임명했다.
이로써 874년 장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고구려는 숨이 끊어졌다.


 
후세 사람들은 한번쯤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더라면 저 넓은 대평원은 우리땅이 되었을텐데 ..' 하는 아쉬움을 갖는다.  장수왕 때 고구려는 백제를 웅진으로 쫓아내고 신라에도 군사적 압력을 강화하였다. 왜 이때 고구려는 그 막강한 힘으로 삼국을 통일하지 않았을까? 

당시 고구려의 지배세력들은 백제와 신라를 통일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다만 백제와 신라를 거수국(지방정부, 제후국) 정도로 알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고구려 멸망의 원인과 삼국을 통일하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고구려 사회의 내부 모순에 있지는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