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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삼국유사 속의 첫 설화, 연오랑과 세오녀

 

 

삼국유사 속의 첫 설화, 연오랑과 세오녀

 

『삼국사기』의 「신라본기」 '아달라왕' 조 20년(서기 173년)에 보면 '왜왕 비미호가 사신을 보내와 인사했다'라는 짤막한 기록이 있다. 여기서 비미호는 한자로 표기한 '히미코'라는 이름이다.

 

히미코는 누구일까? 일본 왕조의 계보에 나오지 않는 이 왕은 어디에 나라를 세우고, 이웃한 신라와 외교 관계를 가지려 했을까?

 

히미코에 대한 기록은 중국의 역사서 『삼국지』 가운데 『위지』의 「왜인전」에도 등장한다.

그 무렵 일본은 성무왕(131~190년)의 시대지만, 지방에는 30여 개의 크고 작은 나라가 양립했다. 히미코가 다스리는 나라는 야마일국이다. 그녀는 여왕이었다.  비록 여왕이 다스리는 나라였으나 가장 강성했다 하고, 238년에는 위나라에까지 사신을 보내었다.

 

신라에 사신을 보낸 지 60여 년 뒤의 일이므로, 같은 히미코인지 아니면 히미코가 왕을 일컫는 일반 명사인지 의문이지만,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요 왕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연오랑과 세오녀'의 설화

 

그러면 히미코에 대하여 이토록 궁금해 하는지 그 이유가 알고 싶을게다.

 

그 이유는 『삼국유사』의 아달라왕 때의 이야기 하나가 히미코의 정체에 대한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연결고리는 바로 「기이」편의 '연오랑과 세오녀'에 대한 설화이다.

 

제 8대 아달라왕이 즉위한 지 4년이 되던 해는 정유년(157년)이다.

 

동해 바닷가에 연오랑과 세오녀 부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연오가  바다가 나가 해초를 따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가 나타나 그를 태워서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이는 비상한 사람이다'고 하여, 이내 왕으로 삼았다.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긴 세오는 나가서 찾아보았다. 남편의 신발이 벗어져 있는 것을 보고 그 바위 위에 오르니, 바위가 또한 이전처럼 태워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워하며 왕에게 바쳐, 부부가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세오를 귀비로 삼았다.

 

이 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다. 일관이 아뢰었다.

"해와 달의 정령이 우리나라를 버리고 지금 일본으로 가 버린 까닭에 이 같은 변괴가 일어났습니다."

 

왕은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찾아오게 하였다. 연오는 말하였다.

"내가 이 나라에 이른 것은 하늘이 시켜서 된 일이다. 지금 어찌 돌아가겠는가? 그러나 왕비가 짠 가는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면 될 것이다."

 

그리고서 그 비단을 내주었다. 사신은 돌아와 아뢰었다.

그 말에 따라 제사를 지낸 다음에야 해와 달이 예전처럼 되었다.

 

정령 : 만물에 근원을 이룬다는 신령스러운 기운

 

위 설화는 아달라왕 때의 일이다. 히미코가 사신을 보낸 것은 바로 아달라왕 때, 세오녀가 일본으로 갔다는 아달라왕 4년에서 부터 16년 뒤이다. 일본에 가서 자리잡은 세오녀는 히미코가 되어, 금의환향하듯 자랑스레 본국에 사람을 보냈다고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설화에 대한 역사적 고찰

 

아래 표는 신라 초기 왕실의 체계도이다.

그러나 신라의 초기 왕실에 대한 기록을 볼 수 있는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의 내용은 서로 상이하다. 예를 들어 『삼국사기』에서는 아달라왕의 부인이 지마왕의 딸이라고 했는데,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지마왕의 딸이 일성왕의 부인이라고 하였다.

 

 구 분

신 라 

일 본 

 기원전 97년

 

 10대 숭신왕

 기원전 57년

 1대 혁거세왕

 

 기원전 29년

 

 11대 수인왕

 기원후 4년

 2대 남해왕

 

 24년

 3대 유리왕

 

 57년

 4대 탈해왕

 

 71년

 

 12대 경행왕

 80년

 5대 바사왕

 

 112년

 6대 지마왕

 

 131년

 

 13대 성무왕

 134년

 7대 일성왕

 

 154년

 8대 아달라왕

 

 

그리고 일연은 아달라왕부터 벌휴왕.내해왕.조분왕에 대해서 「왕력」편은 물론 「기이」편에도 아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삼국사기』는 이 기간을 얼기설기 이어가는데, 역사적 내용을 파악하기에는 너무 부실하다.

 

이렇게 혼란스럽고 빈약한 까닭은 무엇일까?

사료가 미비한 탓도 있겠으나, 아무래도 신라 초기의 왕실이 그만큼 안정되지 않았기에 이 시기의 기록을 여기저기서 찾아서 한 줄기로 꿰기란 쉽지 만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일연은 삼국의 역사적 사실을 쓰면서 『삼국사기』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였는데, 이 때 일어난 한 사건, 연오랑과 세오녀의 도일을 소개하면서 명쾌하게 '아달라왕 4년'이라 자신있게 기록하였다는 점이다.

내용이 결코 사실적이지도 않고, 『삼국사기』에는 없는 내용인데 일연은 어디서 인용했다는 근거도 밝히지 않았다.

 

 

아름다운 설화 속에 담겨진 의미는?

 

일연은 승려다. 승려생활은 한 곳에 머물러 살 수 없는 운명이라 운수행각이라고 한다. 일연도 마찬가지로 여기저기 옮겨 다녔지만 남다른 일 하나를 하였다. 자기가 머문 지역에 전해오는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고 모았다는 점이다. 자신이 승려 신분이지만 불교를 떠나 단군신화를 비롯한 광범위한 얘기들을 수집한 민속학자와도 같았다.

 

 

 

 

연오랑 세오녀 이야기 또한 일연의 이 같은 노력에서 모아졌으며, 자신있게 아달라왕 4년이라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연이 영일에서 가까운 오어사라는 자그마한 절에 머무른 것은 그의 나이 환갑이 가까왔을 때이다. 오어사는 지금 가 보아도 한가롭기 그지없는 산골 마을에 위치해 있다. 영일을 거쳐 들어가는 이 마을에서 그는 꿈처럼 전해오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삼국유사』 속에 소중히 기록하였다.

 

설화 속에 나오는 연오와 세오는 해와 달의 정령이다. 신라 사람들이 잃어버린 것은 해와 달이 아니라 해와 달로 여기는 정령이었던 것이다. 연오와 세오는 유독 토착신앙이 강한 신라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이다. 바닷가 마을, 이 땅에 해와 달이 가장 먼저 뜬다고 믿는 마을 사람들에게서, 토착 신앙의 바탕이 되는 설화가 없다면 더 이상할 것이다.

 

이처럼 자연의 의인화는 설화를 아름답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이다. 단군신화의 곰이야기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일연은 귀비고, 영일현, 도기야의 작명 내력을 밝히며 설화를 끝 맺는다.    

"비단을 왕의 창고에 보관하고 국보로 삼았다.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라 하고, 하늘에 제사지낸 곳을 영일현이라 이름지었다. 또는 도기야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