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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통해 본 문무왕과 사천왕사

 

삼국유사와 삼국사기를 통해 본 문무왕과 사천왕사

 

신라 제30대 문무왕(661∼681) 법민은 태종무열왕(김춘추)과 문명왕후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 문명왕후는 김유신의 누이인 문희이다. 문희 이전에 김춘추에게는 자식이 있었으며, 가야국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법민이 왕위에 오르기는 쉽지 않았다.

 

 

 

법민이 당나라에 들어간 해는 650년, 아직 아버지 김춘추가 왕위에 오르기 전이었다.그로부터 4년 후 아버지가 왕위에 오르고, 본격적인 통일전쟁이 시작되는 660년, 당나라에 머문 지 11년째 되던 해, 백제 원정에 나선 소정방의 군대를 따라 귀국하였다.

 

그리고 그 해 아버지가 죽고 법민은 이듬해 왕위에 오른다.

신라의 삼국 통일을 말할 때면 언제나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태대각간 김유신을 들지만, 실질적인 통일의 주역은 문무왕 법민이다. 백제가 멸망한 663년이 문무왕 3년때이고, 고구려가 멸망한 668년이 문무왕 8년이다. 

 

태자시절에도 이버지 못지 않은 활약을 하였고, 20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통일 후의 마무리 특히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를 해결하는 과정은 통일을 위한 전쟁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신라가 당나라를 끌여들여 벌인 통일 전쟁이 한민족의 영토를 축소한 결과를 초래했지만, 한반도를 통체로 집어 삼키려는 당나라의 속셈을 고려한다면, 문무왕 법민은 그런 당나라와 맞서 최대한 땅을 지켜낸 인물이기도 하다.

 

그러면 문무왕 법민은 삼국유사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지 알아보도록 하겠다.

 

 

신라를 지켜낸 사천왕사

 

삼국유사기이」편의 '문무왕 법민' 조는 사천왕사 건립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무진년(668년)에 신라와 당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켰는데, 평양에 온 당나라 군사 일부가 돌아가지 않고 진영에 머물렀다. 기회를 보면서 신라를 습격하려는 의도인데, 문무왕이 이를 알고 선수를 쳤다. 그러자 이를 빌미로 설방을 장수로 삼아 50만 대군이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마 당나라에 유학 중이던 의상이 급히 귀국하여 그 사실을 알리고, 방어책으로 마련한 것이 명랑의 비법이었다. 명랑은 "낭산 남쪽 기슭에 신유림(神游林)이 있으니, 이 곳에 사천왕사를 창건하고 도량을 열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절이 완성되기도 전에 사태가 급하게 되자, 문명은 밀교 승려 12명과 문두루 비법을 사용해 당나라 배를 모두 수장시킨 것이다.

 

 

▲ 사천왕사터에서 발견된 거북머리

 

다분히 만화같은 얘기이다. 그래서인지 『삼국사기』에는 이 같은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다만 668년과 671년 사이에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심각한 외교 문제가 일어났음을 여러 사건을 통해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그 중에서도 671년에 당나라와 신라 사이에 오간 장문의 외교 문서 내용이 삼국사기에 전문이 실려있는데, 7월 26일, 황제의 이름도 아닌 총관 설인귀의 이름으로 온 글에 신라를 은혜도 모르는 반역자로 매도하고 있다.

 

이처럼 신라와 당나라는 살얼음을 밟는 듯한 관계가 계속되었으며, 삼국통일 이후 신라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가가 삼국사기에는 사실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에 비한다면 일연의 기술은 상당히 낭만적이다. 사천왕사를 짓고 밀교승들의 문두루 비법으로 간단히 쳐부순 것처럼 되어 있으니 말이다.

 

사천왕사가 낙성된 해를 삼국사기는 문무왕 19년(679년)으로 적고 있다. 문무왕이 죽기 1년 전의 일이다.

 

 

문무왕에 대한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

 

문무왕은 왕위에 있던 20년 동안 당나라와의 투쟁으로 한시도 편할 날이 없었다.

 

국사기에 실려 있는 조서(왕이 죽을 때 남긴 글)에는 "풍상을 무릅쓰다 보니 마침내 고질병이 생겼으며, 정무에 애쓰다 보니 더욱 깊은 병에 걸리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죽은 해의 나이 겨우 56세였다. 

 

한편 그의 조서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도 눈에 띈다.

옛날 만사를 아우르던 영웅도 끝내는 한 무더기 흙더미가 되고 말아, 꼴 베고 소 먹이는 아이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가 그 옆에서 굴을 팔 것이니, 분묘를 치장하는 것은 한갓 재물만 허비하고 역사서에 비방만 남길 것이요, 공연히 인력을 수고롭게 하면서도 죽은 혼령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하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을 금치 못하겠으니, 이와 같은 것은 내가 즐겨하는 바가 아니다. 

 

그러면서 화장을 하라고 유언한다. 이 대목은 다분히 김부식의 손에 의해 유교적으로 치장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일연은 문무왕의 최후를 이렇게 적고 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1년 되던 영융 2년 신사년(681년)에 돌아가셨다.

왕이 유언하신 말씀에 따라 동해 가운데 있는 큰 바위 위에 장사지냈다.

 

왕이 평소 지의법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짐은 죽은 뒤에 나라를 지키는 큰 용이 되겠소. 그래서 불법을 높이 받들고 나라를 지키겠소."

"용은 짐승인데 어찌 하시렵니까?"

"나는 세상의 영화를 싫어한 지 오래 되었소. 만약 악한 업보 때문에 짐승으로 태어난다면 이는 짐이 평소에 가진 생각과 맞는다오."

 

살아서는 사천왕사를 지어 나라를 지킨 문무왕은 죽어서는 용으로 태어나 그 일을 계속하겠다고 한다.

 

 

문무왕의 이같은 생각은 그 아들 신문왕에게 이어져 더욱 아름답게 꽃 핀다. 실제 신라 천 년의 역사에서 두 왕대에 걸쳐 전성기를 구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