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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positorium/History

해학이 있는 조선시대 점술

 

 

해학이 있는 조선시대 점술

 

2012 대선이 얼마남지 않았다. 그리고 이맘때쯤 정치인들은 유명 점쟁이를 찾는다고 한다.

 

점쟁이의 말을 100% 믿는 건 아니겠지만 꼭 선거철이 되면 유명세를 타는 쪽집게 점쟁이가 등장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여러 명의 점쟁이들의 말 중에 누군가는 맞추는게 당연한거 아닌가. 확률적으로 봐도 로또보다는울 것 같다.

 

 

 

 

유명한 예언가인 노스트라다무스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예언서인 <백시선, 영어로 번역되어 '모든세기들'이라고도 함>은 1555년부터 3797년까지의 역사적 사건과 대규모 재난(전쟁, 자연재해, 전염병 등등)을 예언한 책인데, 실제로 4행시로 되어 있는 원본의 내용보다는 이를 임의적으로 해석한 해설서들의 풀이가 더 다양하다.

 

어릴 적에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대한 책을 읽고(정확히는 해석서를 읽은거지만) 무척이나 감탄한 기억이 난다.  나폴레옹과 히틀러, 그리고 9/11 테러(이는 요근래 주장하는 내용임)가 정확히 예언되어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모두 사전이 아니라 사후에야 인지된 것이며, 그나마도 억지로 끼워 맞춘 내용에 불과하다는게 중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지난 수백 년간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계속 대중적 인기를 누릴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인간은 원래 강력한 호기심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2012년 12월 21일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는 마야 예언도 그 중에 하나일 것이다.

 

정치인들이 유명 점쟁이를 찾아 미래에 대해 알아보려는 심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특히 박빙의 경쟁을 하는 선거판이라면 평소 점술을 믿지 않던 사람이라도 불안한 마음에 점쟁이를 찾아갈 것이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의 점쟁이들의 신통력은 노스트라다무스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대단했던거 같다. 특히 조선시대 점쟁이의 점괘는 지금들어도 신통력이 대단했던거 같다. 

 

이번 글에서는 신통력은 물론 해학도 있는 조선시대의 다양한 점술 이야기를 알아 보겠다.

 

 

해학이 있는 조선시대 점술

 

고대 유럽의 경우 별자리를 관찰하여 보는 점성술(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도 점성술을 기반으로 함)과 동물의 내장을 이용하는 내장점 그리고 펼친 책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문장으로 점을 치는 개전점이 주를 이루지만, 우리나라의 점술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서 인지 주로 글자로 점을 치는 파자점(破字占)이 많이 행해졌다.

 

조선을 건국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이성계가 점쟁이를 찾아갔을 때의 일이다. 이성계가 물을 문(問) 자를 짚자 점쟁이가 말했다. "좌로도 임군 군(君)이고 우로도 그러하니 필시 군왕이 될 운이로다!"

 

이번에는 옆에 있던 거지가 신분을 위장하여 같은 문 자를 짚자 점쟁이는 망설이지 않고 점괘를 내 놓았다.

"문(門) 앞에 입(口)이 하나 달렸으니 남의 집 대문을 찾아다니며 빌어먹을 팔자다!"

 

반대로 임금이 신분을 감춘 채 점쟁이에게 자신의 운을 물은 적도 있었다.

임금이 짚은 것은 왕(王) 자였는데 점쟁이의 점괘는 다음과 같았다.

"임금 왕(王)은 곧 땅(土) 위에 오직 한 사람(一)만이 있는 형국이니 기필코 임금이 될 운세로다!"

 

이번에도 거지가 같은 글자를 짚었는데 점쟁이는 명쾌하게 그의 운세를 일러주었다.

"길(土) 위에 사람이 한 일(一) 자로 길게 누운 꼴이니 앞으로 길에서 얼어 죽을 팔자다!"

 

위에 얘기가 사실인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오랫동안 전해지고 있는 일화로 조선시대 점술이 생활 속에 일상으로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리고 점괘도 파자점을 통해 얻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술은 조선후기에 와서도 여전히 사람들과 밀접한 생활에 일부분이었다. 

 

고종이 어느 날 꿈 속에서 밭 전(田) 자를 보았다. 신하 한 사람이 해몽을 하였다.

 

"밭 전(田) 자는 어(魚) 자에 머리와 꼬리가 없는 것이니 도마에 오를 물고기 팔자고, 갑(甲) 자에 다리가 없는 것이니 군사력이 약해지며, 입(口)이 열 십(十) 자에 싸여 네 개의 입(口)을 만든 것이니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아 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이처럼 글자로 풀이하는 점술은 양반가나 왕실에 널리 유행되고 있었다.

 

조선시대 파자점은 민간에도 널리 유행하였다. 그러나 파자점이 점술에만 이용된 것은 아니다.

민간에 유행한 파자점은 남녀간의 사랑의 메세지로도 응용되었다.

 

어느 마을에 사는 총각이 이웃 마을 처녀에게 만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처녀에게서 곧 답장이 왔는데 그 안에 문서 적(籍) 자만 달랑 적혀 있자 총각은 혼자서 싱긍벙글 좋아하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그 이유를 묻어보자 총각은 다음과 같이 풀이 해주었다.

 

"적(籍)을 하나하나 풀어보자면 제일 위에 있는 글자는 대나무(竹) 밭을 뜻하는 것이오, 왼쪽은 오라는(來) 뜻이지. 그리고 오른쪽의 석(昔)은 열 십(十) 자가 2개에 한 일(一)자가 받침으로 있고 그 아래 날 일(日)이 있는 것이니 결국 '21일(二十一日)에 대나무 밭으로 오라'는 말이니 기분이 좋을 수 밖에."

 

 

조선시대의 점술은 일상생활뿐 아니라 사냥과 농사 그리고 천재지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 이용되었다. 점술의 목적이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을 추리하고 예측하는데 있다지만 조선시대의 점술은 서민들의 일상 생활 자체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점술 자체로만 보아도 현재보다는 단순했던 시대였기에, 점쟁이의 점괘가 그만큼 신통력을 발휘하지 않았을까.